대학 속 인공지능: 더 벌어진 가르침과 배움 사이의 간극
저항, 단절, 그리고 하이프가 기계를 두고 맞붙는다. 그사이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 사이의 해묵은 균열은 더는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지진이라기보다 엑스레이 사진에 가깝다. 언어 모델은 대학이라는 제도가 수십 년 동안 상을 줘 온 바로 그것, 즉 유창하고 그럴듯한 학술 산문을 거의 공짜로 만들어 낸다. 그 뒤에 이해가 있다는 보장은 없이 말이다. 그래서 언어 모델은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 사이에 이미 존재하던 위기를 눈에 보이게 만든다. 공론장은 AI가 대학을 "망가뜨렸다"고 선언하는 쪽, 저항을 조직하는 쪽, 구원을 파는 쪽으로 나뉜다. 세 진영 모두 도구를 두고 싸운다. 관계를 두고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통역사로서의 기계
흔히 그냥 지나치는 데이터 하나에서 시작해 보자. 2026년 3월에 발표된 HEPI와 Kortext의 영국 설문조사는 2025년 12월 전일제 학부생 1,054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이에 따르면 95%가 어떤 식으로든 AI를 사용하고, 94%는 평가 대상 과제에 AI를 써 본 적이 있다. 2024년에는 53%였다. 헤드라인은 거기서 멈췄다. 거의 모두가 "부정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제에서 가장 흔한 사용법은 생성된 텍스트를 붙여 넣는 것이 아니다. 보고서의 그림 4에 따르면 그렇게 했다고 인정한 비율은 12%에 불과하다(2024년에는 3%). 가장 흔한 것은, 61%에 달하는, 기계에게 개념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보고서 표현 그대로 옮기면, 학생의 거의 3분의 2가 개념 설명을 듣기 위해 AI를 쓴다.
언어 모델은 대학이라는 제도가 수십 년 동안 상을 줘 온 바로 그것, 즉 유창하고 그럴듯한 학술 산문을 거의 공짜로 만들어 낸다. 그 뒤에 이해가 있다는 보장은 없이.
이 수치는 차분히 읽을 필요가 있다. 자기 보고식이고, 한 나라에서만, 학부생 표본으로 이뤄진 조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수치는 어떤 도덕적 공황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말해 준다. 다수의 학생이 AI를 수업에서, 읽기 자료에서, 과제 문항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풀어 주는 통역사로 쓴다는 사실이다. 기업들이 직접 내놓은 보고서들도 — 이해관계가 걸린 출처이니 그렇게 감안하고 읽어야 하지만 —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Anthropic의 첫 교육 보고서는 2025년 4월 대학생들이 Claude와 나눈 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39.3%가 교육용 콘텐츠를 만들거나 개선하는 데 쓰였고, 나머지 중 상당 부분은 기술적인 설명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1965년 피에르 부르디외, 장클로드 파스롱, 모니크 드 생마르탱은 Rapport pédagogique et communication을 펴냈다. 영어로는 Academic Discourse: Linguistic Misunderstanding and Professorial Power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그들은 프랑스 대학생들에게 어휘 시험을 치르게 해서, 자신들이 배우는 언어를 얼마나 이해하는지 측정했다. 이해도는 매우 불완전했고 사회적 출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교수들은 학생들이 당연히 이해하리라 여겼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단어에 대한 익숙함에 기댄 이해의 환상을 일찌감치 키우는 법을 배웠다. 이 책의 결론은 불편하다. 교육 관계는 언어적 오해 위에, 그리고 그런 오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유된 허구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교수는 이해받는 척하고 학생은 이해하는 척한다. 각자의 환상이 서로에게 알리바이가 되어 주고, 집안 내력으로 그 언어 체계를 몸에 익힌 사람이 앞선 출발선에 선다.
60년이 지난 지금, 그 오해는 산업적 중개자를 찾아냈다. 이걸 부정행위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오히려 교실이 결코 제대로 해낸 적 없는 번역을 외주로 돌리는 것이다. 흥미로운 질문은 이제 기계가 설명을 잘하느냐 — 때로는 잘하고 때로는 지어낸다 — 가 아니라, 왜 통역사가 필요했느냐가 된다.
생년월일이 있는 위기
그 계보는 부르디외보다 오래됐고, 코르도바 억양을 띠고 있다. 1918년 6월 21일자로 데오도로 로카가 작성한 대학 개혁의 서두 선언문(Manifiesto Liminar)은 "대학 교수진의 신성한 권리" 위에 세워진 대학 체제를 묘사했다. 그리고 그것에 다른 권위의 개념을 맞세웠다. 학생들의 집에서 권위는 명령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안하고 사랑함으로써, 즉 가르침으로써" 행사된다는 것이다. 또 모든 교육 품질 위원회가 벽에 걸어 둬야 할 문장을 남겼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정신적 유대가 없다면, 모든 가르침은 적대적이며 따라서 불모다." 그는 기술에 대해 말한 게 아니었다. 깨진 관계에 대해, 그리고 위계로는 그 관계를 고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반세기 뒤, 이반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1971)에서 학교가 학생에게 가르침과 배움을, 진급과 교육을, 졸업장과 역량을, 유창함과 새로운 것을 말할 능력을 혼동하도록 가르친다고 썼다(번역은 필자). 2026년에 읽으면 마지막 짝은 거의 언어 모델에 대한 기술적 설명이다. LLM은 그냥 유창함 그 자체다. 무언가를 이해한 텍스트의 그럴듯한 표면을 만들어 낸다. 유창함을 능력과 혼동하던 제도라면, 값싼 유창함 기계 앞에서 알리바이를 잃는다.
유창함과 배움의 혼동은 측정된 적도 있다. 2019년 루이 들로리에가 이끈 하버드 물리학과 연구팀은 학생들을 무작위로 배정해, 경험 많고 평판 좋은 교수진의 강의식 수업과 같은 내용의 능동 학습 세션을 비교했다(PNAS, 2019). 능동적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더 많이 배웠지만, 강의식 수업을 들은 학생들보다 덜 배웠다고 느꼈다. 저자들은 인지적 노력이 오히려 잘 못 배우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으며, 탁월한 강연자는 배움의 느낌을 너무 강하게 만들어 내 학생들이 결국 그쪽을 선호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챗봇이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유창함은 이미 배움의 느낌을 제조하고 있었다.
이런 해석이 내게 새로운 것은 아니고, 연대기가 중요하다. 2020년 7월,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이자 ChatGPT가 나오기 2년 전, 나는 에드가르 이글레시아스, 호세 루이스 랄루에사, 모이세스 에스테반기타르트와 함께 Revista Internacional de Educación para la Justicia Social에 선언문을 발표했다. 제목에서부터 비판적이고, 세대를 잇고, 지속 가능하며, 공동체적인 교육을 요구했고, 더는 미룰 수 없는 것을 개혁하자고 촉구했다. 팬데믹이 처음으로 그것을 드러냈고 AI가 다시 드러내고 있다. 위기에는 상용 출시일이 없다.
세 개의 참호, 하나의 전제
파열의 담론은 AI가 에세이를, 평가를, 심지어 사고 자체를 망가뜨렸다고 말한다. 저항의 담론은 금지, 탐지기, 공개서한, 손으로 쓰는 시험으로의 회귀로 응수한다. 하이프의 담론은 모든 학생에게 개인 튜터를, 기관에는 라이선스를 무더기로 약속한다. 셋은 적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AI 이전에는 과제와 시험이 배움을 증명했다는 전제다. 그게 사실이라면 망가질 것도, 지킬 것도, 개선할 것도 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셋은 애초에 온전히 존재한 적 없는 원본을 두고 싸우고 있는 셈이다.
셋은 적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AI 이전에는 과제와 시험이 배움을 증명했다는 전제다.
시모어 페퍼트는 이미 1987년 「Computer Criticism vs. Technocentric Thinking」(Educational Researcher, 16(1))에서 이 오류에 이름을 붙였다. 기술중심적 사고다. 컴퓨터가 하나의 문화 속 부품이 아니라 행위자라도 되는 양, 컴퓨터가 배움에 무슨 짓을 하는지 묻는 것이다. 게다가 참호마다 애지중지하는 논문이 있다. 경고론자들은 MIT 미디어랩의 프리프린트 Your Brain on ChatGPT를 사고의 부검 보고서라도 되는 듯 인용한다. 참가자는 54명이었고, 바이럴이 됐을 때는 동료 심사도 거치지 않은 상태였다. 열광론자들은 성과에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메타분석을 인용하는데, 이는 대개 도구를 계속 쓸 수 있는 상태에서 결과물의 품질을 측정한 단기 연구들 위에 세워져 있다.
더 잘 설계된 연구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현장 실험에서 바스타니 연구팀(PNAS, 2025)은 안전장치 없는 GPT-4와, 답 대신 힌트를 주도록 튜터로 설계된 버전을 비교했다. 안전장치 없는 버전을 쓰면 연습 중에는 성적이 오르다가 도구를 치우자 떨어졌다. 튜터 버전에서는 그 피해가 상당 부분 완화됐다. 판, 가셰비치 등이 British Journal of Educational Technology(2025)에 발표한, 대학생 117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실험에서는 ChatGPT로 글을 쓴 학생들이 더 나은 글을 제출했지만 더 많이 배우지는 않았다. 저자들은 여기에 이미 널리 퍼지고 있는 이름을 붙였다. "메타인지적 게으름"이다. 421에서는 토마스 밀그론이 인지 주권의 관점에서 이 연구들을 훑은 바 있다. 나는 이 연구들이 뇌보다는 대학에 대해 말해 주는 바를 강조하고 싶다. 결정적인 것은 도구가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그리고 평가 대상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즉, 참호들이 정확히 논의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이 누락은 광고 쪽에서 보면 더 잘 보인다. 대학에 오기 전 나는 인터랙티브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일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지만 카피라이터이자 플래너이기도 했고, 그 시절 전략 기획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중심에 있었다. 타깃을 정하고 메시지를 다듬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 사람들의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미디어적·기술적 순간에 그들에게 말을 걸게 될지를 이해해야 했다. 그 눈으로 보면 파열의 수사는 진단이라기보다 광고의 한 장르라는 게 금방 보인다. 사실 잘 짜인 기획이다. 시대의 불안, 즉 거의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술 앞의 불안을 포착해, 이전과 이후가 있고 한가운데에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무언가가 놓인 이야기로 돌려준다. 업계가 그렇게 하는 건 직업적 기술이다. 신기한 건 대학 논쟁의 상당 부분이 기획에서는 결코 빠지지 않던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그 이야기를 덥석 사들였다는 점이다. 도구와 메시지에 대해서는 지겹도록 논의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그 삶이 흘러가는 미디어적·기술적 순간에 대해서는 훨씬 덜 논의했다.
폐쇄 회로, 그리고 정전(正典)에 상을 주는 탐지기
시스템 전체를 들여다보면 부정행위보다 더 기묘한 것이 나타난다. 폐쇄 회로다. 학생은 AI로 쓴다. 교수는 AI로 자료를 만들고, 때로는 AI로 채점한다. 대학 교원들이 Claude를 어떻게 쓰는지에 관한 Anthropic의 보고서는 2025년 5~6월 고등교육 기관 이메일을 쓰는 Free 및 Pro 계정의 대화 약 7만 4천 건을 분석하고, 노스이스턴 대학 교원 설문조사로 이를 보완했다. 학생 성과 평가가 전체의 7%를 차지했고, 그 대화들 중 48.9%에서는 과제가 자동화된 방식으로 기계에 위임됐다. 설문에 응한 교원들 스스로는 채점이야말로 AI가 가장 효과가 떨어지는 영역이라고 여겼는데도 그랬다.
연구도 예외는 아니다. ChatGPT 등장 이후 열린 4대 AI 학회에 대한 한 추정은 동료 심사 리뷰 텍스트의 6.5%에서 16.9%가 언어 모델에 의해 상당 부분 수정됐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Science Advances에 실린, 1,500만 건이 넘는 생의학 초록에 대한 분석은 2024년 초록 중 최소 13.5%가 언어 모델을 거쳤다고 추산한다. AI는 이미 사회적·관료적으로 자동화되어 있던 관계를 자동화한다. 아무도 두 번 읽지 않는 루브릭, 판에 박힌 코멘트, 논문 편수로 평가받는 연구. 이 관행 중 어느 것도 2022년에 태어나지 않았다.
가장 널리 퍼진 방어책인 탐지기는 실제보다 더 주목받아야 할 아이러니를 하나 더한다. Patterns에 발표된 연구에서 량 등(2023)은 영어 비원어민이 쓴 TOEFL 에세이 91편을 인기 있는 탐지기 7종에 돌려 봤다. 평균 61.22%가 "AI 생성"으로 분류됐다. 미국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에세이는 거의 오류 없이 분류됐다.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탐지기는 흔한 어휘에 변화가 적은, 예측 가능한 산문을 처벌한다. 지배적 언어 체계 바깥에서 쓰는 사람을 벌하고, 정전을 몸에 익힌 사람이나 기계에게 덜 예측 가능하게 들리도록 주문할 줄 아는 사람은 무죄 방면한다.
언어적 의심을 통해 감시하는 것은 대학이 바로잡고 싶다고 말하는 계급, 출신, 모어의 위계를 그대로 재생산한다.
앙헬 라마는 라틴아메리카 엘리트들이 글쓰기를 권력의 경계선으로 만든 장치를 '문자 도시'라고 불렀다. 탐지기는 그것의 통계 버전이다. 언어적 의심을 통해 감시하는 방식은 대학이 바로잡겠다고 말하는 계급, 출신, 모국어의 위계를 그대로 재생산한다. 모델을 학습시키고 그 모델을 감시하는 도구를 만드는 데이터에서 영어보다 비중이 작은 스페인어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건 기술적 일화 정도로 넘길 일이 아니다. 학문적 시민권의 문제다.
상징 자본: 유창함이 싸구려가 될 때 누가 가치를 잃는가
공론장이 건드리기 꺼리는 층위가 하나 있는데, 나는 이를 개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제기하려 한다. 부르디외는 『호모 아카데미쿠스』(1984)에서 대학 안의 두 가지 자본을 구분했다. 학문 자본은 교수진의 재생산을 좌우하는 권력이다. 심사위원회, 각종 위원회, 교원 자리 같은 것들 말이다. 지적 자본 또는 과학 자본은 업적으로 얻은 명성이다. 그는 두 가지 전략도 묘사했다. 이미 인정받은 이들의 보존 전략, 그리고 막 진입한 이들의 전복 전략이다. 그리고 이력 현상(히스테리시스)에 대해 말했다. 장의 이전 상태에서 형성된 성향이 장이 이미 바뀐 뒤에도 계속 작동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읽으면 '저항'의 일부는 보존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어체 구사, 인용 가능한 박식함, 사유의 증거로서의 에세이를 무기로 인쇄 문화 체제에서 권위를 쌓아 온 사람은, 기계가 바로 그 유창함을 헐값으로 만드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에세이를 원래 모습 그대로 지키자는 건 곧 어떤 자본의 가치를 지키자는 것이기도 하다. 알고리즘 디지털 문화와 더 맞닿아 있는 최근 임용자들은 대개 정반대의 문제를 안고 있다. 기술의 비판적 전유, 경험 디자인, 플랫폼 읽기에 쌓은 그들의 자본은 공인된 학문 자본으로 잘 환산되지 않는다.
이 판도는 조금씩 형태만 달리할 뿐 상당수 대학 체제에서 반복된다. 교원 집단은 고령화되고, 꼭대기에는 나이와 의사결정권이 함께 몰린다.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국립대학 정교수의 3분의 1 이상이 60세 이상이다. 바닥에서는 불안정한 임시직·시간제 강사층이 늘어나는데, 이들은 교육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면서도 그 교육을 규정하는 결정에는 끼지 못한다. 게다가 학문 경력을 평가하는 제도는 강의보다 논문 출판에 압도적인 점수를 준다. 그러니 교육적 관계를 새로 발명해 봐야 누가 승진할지 정하는 평가 기준에서는 별 득이 없다. AI에 대한 태도를 나이, 직급, 계약 형태와 교차 분석한 확실한 데이터는 내게 없다. 따라서 내가 제시하는 건 경험적 발견이 아니라 이론적 해석이다.
이것이 세대 전쟁으로 번지지 않게 막아 주는 단서가 세 가지 있다. 첫째, 차이는 나이에서 오지 않는다. '디지털 네이티브' 신화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다. 이를테면 키르슈너와 드 브라위커레가 Teaching and Teacher Education(2017)에서 그렇게 했다. 중요한 건 생년월일이 아니라 장 안에서의 위치, 그리고 디지털 문화와 맺는 관계의 종류다. 둘째, 양가성은 양방향으로 흐른다. 자기 자본을 재빨리 갈아타 'AI 전문가'를 자처하는 기성 학자도 있고, 가시성의 경제나 자기들이 비판한다는 플랫폼에 포획된 신참도 있다. 셋째는 나 자신도 포함한다. 나는 장 안에서, 그것도 어중간한 위치에서 글을 쓴다. 10년 넘게 디지털 정체성 강좌를 운영해 왔고 그 강좌는 지금 마이크로크리덴셜이 되었는데, 그런 작업이 등재지 논문 한 편과 같은 평가 기준으로 인정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바깥에서 내려다볼 자리 같은 건 없다.
문어체 구사, 인용 가능한 박식함, 사유의 증거로서의 에세이를 무기로 인쇄 문화 체제에서 권위를 쌓아 온 사람은, 기계가 바로 그 유창함을 헐값으로 만드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대면 대학에서 강의하고 원격 대학 한 곳에 자문을 하는데, 두 곳에서 겪는 일은 딴판이다. 원격 기관에서는 경보가 더 일찍 울렸고, 학생들의 부정행위 가능성을 단속하는 것도 더 빨랐다. 하지만 다른 입장으로 옮겨 간 것도 더 빨랐다. 단속하는 대신 결과물보다 과정을 더 생각해 보자고 독려하는 쪽으로 말이다. 내 짐작으로는 이건 기술과는 별 상관이 없고 알리바이와 큰 상관이 있다. 대면 수업에는 원격 수업이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알리바이가 남아 있다. 강의실이 있으면 배움도 있다는 느낌이다. 강의실을 증거로 내밀 수 없는 대학은 학생들이 제출하는 것에 크게 의존하고, 그럴듯한 제출물을 찍어 내는 기계는 그런 대학을 가장 먼저, 정통으로 때린다. 바로 그 무방비 상태 때문에 그곳은 누군가 배웠다는 증거로 무엇을 인정할지 더 일찍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알리바이가 아직 버티고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관계가 아니라 기계를 두고 논쟁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권의 깨알 같은 약관
남은 건 정치경제학인데, 이건 대개 기회라는 언어에 포장되어 도착한다. 빅테크는 긴축 상황에 교육용 라이선스를 내밀고, 효율성은 교육학으로 둔갑해 팔린다. 유럽의 규제는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AI 법은 교육 분야에서 입학 결정, 성과 평가, 시험 감독에 쓰이는 시스템을 고위험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AI에 관한 디지털 옴니버스로 알려진 규정 (EU) 2026/1744가 2026년 7월 27일 발효되면서 그 의무는 2026년 8월 2일에서 2027년 12월 2일로 미뤄졌다. 그사이 결정은 강의실의 거의 누구도 읽어 보지 않은 라이선스 계약서에서 내려진다. 코리 닥터로가 인터넷을 두고 묘사한 엔시티피케이션에게 이곳은 비옥한 토양이다. 어떤 교육적 관계를 지키고 싶은지 모르는 대학이 어떤 조항을 협상해야 할지 알 리 없다. 토마스 발마세다와 토비아스 J. 슐라이더가 philowashing 분석에서 경고하듯, 시스템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논의한다고 해서 그보다 앞선 질문, 즉 어떤 결정을 시스템에 넘기는 게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답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후안 루오코가 421에서 한 개인, 공동체, 국가가 자신의 지식과 주의력과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제시한 인지 주권에 대한 질문은 각자의 머릿속에서 풀리지 않는다. 그 질문은 무엇을 지식으로 칠지, 무엇을 부정행위로 칠지, 그리고 그 둘에 대해 누가 최종 결정권을 가질지 정하는 제도 속에서도 판가름 난다. 블랙마운틴 칼리지의 실험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의 다른 관계를 시도한 대학들이 있었다는 걸 상기시킨다. 두머와 하이퍼 사이의 논쟁은 AI에 대한 질문이 거의 언제나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놓치고 싶지 않은 마지막 아이러니가 하나 있다. 이 글은 AI로 영어로 번역되고, 그다음에 사람이 검토할 것이다. 번역이 매끄럽게 나오면, 그 과정에서 글이 이해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매주 평가 플랫폼에 올라오는 수천 건의 과제에서 벌어지는 일과 똑같다. 차이라면 여기서는 그걸 대놓고 말한다는 것뿐이다.
한 세기도 더 전에 코르도바의 학생들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의 연결을 요구했다. 기계가 그 연결을 깨뜨린 건 아니다. 기계는 그것이 점잖은 오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고, 그걸 서비스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이제 서로 이해하고 있었던 척을 더는 할 수 없게 될 때 우리가 무엇을 할지가 남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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