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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ck chair': 포르노에서 소셜미디어의 은유가 되기까지

불륜 밈부터 'cuck chair'까지, 포르노의 논리가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다. 우리는 왜 직접 사는 것보다 지켜보는 것에 더 빠져드는 걸까.

Por Naoto Naka · 19 oct. 2026 · 16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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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만 해도 트위터에 들어가면 "네가 뭘 하고 있는 동안, 어떤 양아치가 네 여자친구랑 자고 있다"의 변주를 안 보는 게 불가능했다. 실존하는 남자(너)를 상상 속의 다른 남자(더 나은 놈)와 비교하는 유머 포맷이었다. 요지는 원래 네 것이었던 자리를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고, 너는 그걸 구경하거나 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bitch wife" 밈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포맷의 최신 버전은 "뭐뭐를 못 하는 네 남친"이다. 하나같이 거세를 떠올리게 하는 변주들이다. 아무튼 트위터에 들어갈 때마다 바람, 여자에게 부족한 남자, 혹은 그 둘의 조합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줄줄이 있는 것 같고, 그것도 꽤 포르노적인 시선에서인 경우가 많다.

얼마나 노골적인지 놀라울 정도다.

이런 종류의 농담의 기원을 추적하다 보면, 루프의 층위를 하나씩 벗겨내다 보면, "cuck"을 무시할 수가 없다. 지난 10년 동안 사용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 욕설이다. 몇 년 전에는 미국 정치판에서의 쓰임새를 분석하는 여러 기사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내가 이 단어를 알아보기 시작한 건 게이머게이트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당시 대안우파와 연결된 유저들이 많이 활동하는 포럼이나 커뮤니티에서 꽤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프를 보면 계속 오르기만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최고점 이전에 2016년과 2018년 사이에 두 개의 정점이 있다. 이 둘은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꺾은 것, 그리고 cuckservative 같은 용어와 함께 이 욕설이 주류 정치에서 대중화된 것과 관련이 있다.

"Cuck"은 지난 10년 동안 사용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 욕설이다. 몇 년 전에는 미국 정치판에서의 쓰임새를 분석하는 여러 기사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커콜드 포르노(cuckporn)는 기본적으로 자기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섹스하는 걸 보며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남자친구는 참여하지 않으니 쓰리섬은 아니다. cuckold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데서 유래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꽤 즐겨 썼다.

여러 성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페티시에는 다양한 동기가 있을 수 있다. 굴욕감, 마조히즘, 컴퍼션, 통제, 노출증, 혹은 이 모든 것의 조합.

이 용어가 대중화된 뒤로는 맥락과 상관없이, 다른 누군가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밖에서 구경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그래서 축구판에서 흔히 쓰는 "TV로 보는 놈"이나 "벤치 신세" 같은 놀림과 아주 가까워졌다.

2016년 미국 대선 이후 이 용어가 대중화된 뒤, 폰허브가 발표한 보고서에서 cuckold는 2017년 조회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카테고리로 꼽혔다. 전년 대비 72% 증가였다. 그러니까 cuck이 점점 더 일반적인 용어가 되어가는 동안, 그 말이 나온 원래의 페티시도 포르노 안에서 함께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몇 년간에도 검색 증가율 상위권에 다시 등장했고, 2025년에는 cuckold 검색량이 전년 대비 또 73% 늘었다.

민주당 공식 계정에서 올라온 트윗

커콜드 포르노의 증가와 누군가 네 마누라랑 잔다는 농담에 대한 인터넷의 집착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플랫폼 안에서 포맷이 취하게 되는 성공적인 형태일 뿐일 수도 있다. 어쨌든 포르노는 기술 발전의 거대한 엔진이니까.

생물학에는 갑각류화(carcin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기본적으로 수백만 년의 진화로 갈라진 서로 다른 갑각류들이 점점 게를 닮아가는 현상을 말한다. 종으로서는 사실 친척도 아닌데, 희한하게도 게 모양이 편리한 것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갑각류는 어떻게 게가 될까? - Vista al Mar

트위치가 폰허브로 변이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해양생물학자는 아마 없겠지만, 포르노의 논리에는 너무 잘 작동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다른 플랫폼들도 결국 조금씩 닮아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꼭 홀딱 벗은 사람들이 나오는 포르노를 말하는 게 아니라(많은 플랫폼이 그쪽으로 기울긴 하지만), 구조로서의 포르노 말이다. 모든 것이 남을 지켜보고 자위적 행위에 빠지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걸 화면을 사이에 두고 하느냐 아니냐는 큰 차이다.

폰허브에서 cuckold는 2017년 조회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카테고리로 꼽혔다. 전년 대비 72% 증가였다.

이 모든 일이 인터넷에서 벌어진다는 데에는 뭔가 역설적인 게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하는 걸 계속, 또 계속 보는 것인 곳이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게임을 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을 보고, 우리가 살 수 없는 물건의 언박싱을 보고, 우리보다 전문성 있게 영화에 리액션하는 사람을 보고, 먼 도시를 돌아다니고, 공부하고, 아니면 그냥 무슨 이유에선지 (30초 동안은) 내 인생보다 더 흥미로운 남의 인생을 산다.

그렇다고 보는 것이 그 일을 직접 하는 것의 열화판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꽤 노골적인 지점으로 수렴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인게이지먼트를 만드는 건 감정적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다. 플랫폼 최적화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 효과 때문에 포르노 플랫폼을 레퍼런스로 삼는다. 아무 포장도 없이, 대놓고.

무슨 그리스 신화 속 형벌 같다.

보드리야르에게 안부를 전한다. 그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섹스를 넘어선 포르노적인 것을 사유했고, 그것을 가시성의 비대증, 즉 비밀과 거리가 사라질 때까지 모든 것이 점점 더 드러나야 하는 상태와 연결지었다. 틱톡을 좋아했을 것이다.

장담은 못 하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섹스와 아무 상관 없는 온갖 것에 porn을 갖다 붙이는지도 모른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고 잘못 알려진 닳고 닳은 명언은 차치하더라도, foodporn, travelporn, architectureporn, productivityporn, studyporn, bookporn 같은 게 수천 개는 있고, 음식을 성적으로 묘사하는 요리사 릴스는 말할 것도 없다.

거리는 사라지고, 긴 과정은 짧은 클립으로 압축되며, 어떤 행동을 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카메라와 최적의 앵글에 종속된다. 어떤 이들은 아예 클립을 위해서만 말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의 기 드보르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활동은 원래의 목적에서 독립해, 그저 만족의 원천으로 관람되기 위해 존재하게 된다. 가시성의 체제가 서서히 살 만함의 체제를 앞지른다.

모든 게 섹슈얼하고, 아무것도 관능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리밍과 특정 포르노 장르는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펙터클과, 더 넓게는 경험 전반과 관계 맺는 방식에 일어난 전방위적 변화의 증상이다. 다시 말해 목표는 참여자(예컨대 밥 먹는 사람)의 경험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관찰자의 경험을 개선하는 것이다.

포르노에서는 이게 꽤 문자 그대로 일어난다. 가장 편하거나 기분 좋은 체위가 아니라, 카메라가 상황을 더 잘 담거나 몸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체위를 택하는 것이다. 매력 때문이든 퍼포먼스 때문이든. 다른 콘텐츠들도 훨씬 덜 성적인 방식으로 같은 요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거리는 사라지고, 긴 과정은 짧은 클립으로 압축되며, 어떤 행동을 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카메라와 최적의 앵글에 종속된다.

인터넷이 우리를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게 만든다는, 이미 닳도록 얘기된 생각까지 갈 필요도 없다. 더 흥미로운(그리고 더 해로운) 건 우리를 열등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과의 관계다. 알고리즘은 어떤 영상이 네 자존감을 박살내는지 알 필요가 없다. 살 만한 것보다 보이는 것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체류 시간만 만들어내면 그걸로 그만이다. 볼 수만 있으면, 그게 네 인생을 망치든 말든 상관없다는 얘기다.

돈 더 많고, 더 예쁘고, 더 성공한 무한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도록 강요하는 이 끝없는 노출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범주는 결국 커콜드와 닮은꼴이 아닐까 싶었다.

덧붙이자면, 커콜드는 주로 남성의 페티시인 듯하고, 가장 흔한 동기는 굴욕과 결부된 쾌락과 관련이 있다. 쉽게 말해, 너무 킹크셰이밍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하자면, "너보다 나은" 누군가가 네 마누라랑 있는 걸 보고, 너는 그동안 슈퍼맨 옷 같은 걸 입고 옷장에 숨어 있는 거다.

릭 앤 모티. S01 E03 "Anatomy Park".

이 욕설의 특징은 성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이 욕망의 구조에 있다. 오쟁이 진 남자는 통상 "자기 것"이었을 것을 다른 남자가 즐기는 걸 보며 쾌락을 얻는다.

어떤 남자들은 일부러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 더 잘생기고, 더 근육질이고, 더 성공했거나, 그냥 더 매력적인 사람을 찾는다. 어떤 인플루언서들은 자기를 동경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파트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남자들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경우 쾌락은 단지 섹스를 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일종의 비교에서 오는 것 같다. 침대에서 자기가 모자란 부분을 다른 놈이 채워주는 게 흥분되는 것이다.

바로 이 판타지에서 커크 체어(cuck chair)가 나왔다. 호텔 방에 수상할 정도로 침대 쪽을 향해 놓인 그 안락의자 말이다. 농담에 따르면, 오쟁이 진 남자가 앉아서 구경하라고 거기 놓여 있는 거다.

이런 류의 용어가 흔히 그렇듯, 나중에는 실제 커콜드 상황이 있을 필요도 없어졌고, 의자가 침대에 너무 가까이 있기만 해도 웃음이 터졌다.

또 하나의 요소는 인종이다. 대부분의 경우 오쟁이 진 남자는 비리비리한 백인 남성이고, 그의 아내와 관계를 맺는 쪽은 흑인이나 라틴계로, 대개 더 근육질에 키 크고 남성적이다. cuck이 대안우파 포럼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게 놀랍지 않은 이유다. 그런 곳에서는 이런 성적 불안/공포가 '거대한 대체' 이론 같은 정치적 불안/공포로 아주 쉽게 번역될 수 있으니까.

트럼프 선거운동 기간에 cuckservative는 젭 부시나 마코 루비오 같은 온건파 공화당원들을 향해 쓰이기 시작했다. 이민 문제를 비롯한 여러 사안에서 너무 물러터졌다는 비난이었다. 비유가 꽤 직접적이어서 잘 먹혔다. 아르헨티나식 차별적 등가물을 찾자면 "네 여친은 빈민촌 놈이랑 잔다" 정도일 것이다.

누군가 바람 얘기를 너무 노골적으로 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밈

게다가 이 남자는 우월한 상대 앞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그걸 너무 즐긴 나머지 그 만남을 직접 주선까지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온라인 리뷰도 많다

자, 다시 밈으로 돌아가자면, 커크 체어는 요즘 시대에 대한 은유로 기가 막힌 것 같다. 밖에서 보면 패배자의 자리지만, 커크에게는 거기가 바로 참여하고 싶은 자리일 수 있다. "여자를 차지"하진 못해도 어쨌든 경험에는 참여한다. 어떤 면에서 패배는 이미 그 상황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는 자리를 기본 옵션으로 달고 나오는 셈이다.

인터넷은 좌절이 너를 회로 밖으로 끌어낼 무언가로 변이하기 전에 그것을 흘려보내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경험을 어마어마하게 제공한다. 불만을, 그리고 그걸 해결하려는 시도까지 포획하는 사이코 머신인 셈이다. 무슨 말이냐면, 일반적인 사회 규칙으로 보면 불쾌한 경험인데도 다른 종류의 만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계속 찾고, 조직하고, 반복하게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거다. 플랫폼은 그 경험이 즐거울 필요가 없다. 필요한 건 오직 그게 계속되는 것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 시퀀스가 도박, 포르노, 둠스크롤링, 레이지베이트, 블랙필, 심지어는 강박적 소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주체는 자기가 받는 게 보상인지 벌인지조차 잘 모르게 된 상태에서도 계속 돌아온다. 쾌락과 고통이 뒤섞이기 시작하는 건, 사람들이 회로 안에만 머물러 준다면 플랫폼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cuck 의자에서 욕망은 패배에 맞춰 자리를 잡는다. 의자는 더 이상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불편한 자리가 아니라, 관객으로서나마 계속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자리가 된다. 내가 이 형상을 그토록 동시대적이라고 느끼는 건, 인터넷이 이와 비슷한 자잘한 해결책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무력감이나 열등감, 좌절감을 안기는 것들 앞에서 플랫폼은 그것을 바라보고, 반복하고, 에로틱하게 만들고, 논쟁하고, 정체성으로 삼는 방법들을 내놓는다. 정작 그 감정을 만들어낸 진짜 원인과는 별로 씨름하지 않은 채로.

"어떤 양아치가 네 여친이랑 자고 있다"는 농담에서 유일하게 진짜인 건 불안뿐이다. 양아치는 없고, 내가 보기엔 여친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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