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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작가 인터뷰 - 에피소드 VII: 마리아나 엔리케스

마리아나 엔리케스: 어린 시절의 공포, 기자로서의 직업 감각, 그리고 집착으로서의 문학.

Por Roberto Chuit Roganovich · 27 oct. 2026 · 32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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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된 내 경험으로 보자면, 사람은 결코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다. 쓰거나, 안 쓰거나. That's it. 그건 성가신 짐 같은 것, 귓가에 매달려 떠나지 않는 견딜 수 없는 유령 같은 것이라서, 결국 자리에 앉아 Word를 열고 자판을 두드리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걸 일반화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고, 피하고 싶은 멍청한 비약이다. 그러니 어쩌면 정말로 살짝 등을 떠밀어 주는 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작가 인터뷰 연재를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존경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 글이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어쩌면 이들의 답변과 조언, 작업 방식 속에서 마침내 단어 하나 뒤에 또 하나를 이어 붙이기 시작하는 데 부족했던 무언가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회의 주인공은 마리아나 엔리케스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어린 시절 잠들기 전 엄마에게 이야기를 지어 들려주면서 문학 속에 뭔가 강력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루시아노 람베르티도 어릴 때 그 힘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식민지 시절부터 람베르티 가문에 드리워 있다는 이른바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먼 친척 이모를 통해서였다.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을 꼽는다. 당신은 언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나? 언제 그 '힘'을 어떤 식으로든 자각하게 됐나?

내가 거짓말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걸 믿는다는 것, 아니면 적어도 그 거짓말 앞에서 무척 불안해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 거짓말을 많이 했다. 애들은 다 거짓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정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말하기 창피할 정도다. 우리 집에는 땅속에 묻힌 작은 수납장 같은 게 있었는데, 꽤 컸고, 예전에는 음식 같은 걸 보관하는 데 쓰던 거였다. 글쎄, 할아버지의 괴상한 발상이었다. 할아버지는 파라과이 사람이었고 상선 선장이었다. 나는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세상을 아주 독특하게 보던 분이었다. 거기, 바닥에 박힌 그 수납장에 뭔가를 지켜 두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한테(어릴 때 사교적인 편이 아니라 친구가 몇 없었다) 이미 돌아가신 그 할아버지가 거기 묻혀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애들 몇 명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엄청 무서워하면서 완전히 기겁을 했다. 그게 나한테는 너무너무 짜릿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거짓말은 훨씬 더 많았다. 그중엔 하고 나서 썩 기분 좋지 않았던 것들도 있고,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다. 아무튼 그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짓말들이 서서히 더 복잡하고 더 병적인 쪽으로 기울어 갔다는 것, 그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힘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줬다. 무슨 말이냐면, 그때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환하거나 즐거운 일이 아니라 오염된 무언가였다. 이야기에 '경이로움' 같은 건 없었다. 꽤 불온한 구석이 있었다.

그때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환하거나 즐거운 일이 아니라 오염된 무언가였다. 이야기에 '경이로움' 같은 건 없었다. 꽤 불온한 구석이 있었다.

'이야기 잘하는 어른' 얘기는 두 사람(사만타와 루시아노)과 같다. 내 경우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종교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하나도. 두 할머니 다. 같이 살던 할머니는 미신을 믿는 편이었고, 그 미신들을 실제 있었던 일처럼 얘기했다. 집안의 유령들, 집안의 비극들을, 언제나 아주 담담하게. 정말 잘했다. 듣고 있으면 넋이 나갔다. 어려서 죽어 들판에 묻었는데 밤마다 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여동생 얘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또 다른 여동생 얘기. 끔찍한 얘기들이었다. 그런데 그걸 전부 환상 단편에 가까운 일처럼 들려줬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원망이나 신파 없이, 거의 신기한 일화처럼 얘기했다. 그때가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당신은 글쓰기 워크숍에 다닌 적이 없다. 첫 장편은 아직 고등학생일 때 쓰기 시작했다. 얼마 뒤엔 미친 듯이 빠른 속도와 견딜 수 없는 마감이 따라붙는 저널리즘이 찾아왔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써 가면서 쓰는 법을 배운 셈이다. 그래도 함께 일했던 편집자에게서 받은 조언 중에 아직 잊지 못한 게 있나? 당시엔 헛소리 같았는데 어른이 된 지금은 옳았다고 인정하게 된 조언이 있나?

후안 포른에게서 많이 배웠다. 충격적이었다. 첫 장편을 그에게 가져갔을 때 나는 출판 과정에 대해 정말 아무 개념이 없었으니까. 작가가 뭘 하는지, 편집자가 뭘 하는지도 몰랐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었다. 게다가 언론학과 1학년이라 '제대로 된 글쓰기'는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작가 친구도 없었고 워크숍에도 안 나갔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한 말이 그때 나를 무척 거슬리게 했다. 대략 이런 말이었다. "네가 가져온 이걸 보면, 너희 세대는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보여 주려고 해." 그 말에 정말 기분이 상했는데, 내가 '우리 세대'라는 짐을 지고 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를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슨 세대니, 단절이니 하는 것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머릿속엔 당시의 그 판, 그러니까 '비블리오테카 델 수르'니 '바벨리코스'니 하는 게 꽉 차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전혀 모르던 내부 사정이었다.

그래서 기분은 상했지만 떠나지 않았다. 꺼지라고 하지도 않았고 아무 짓도 안 했다. 처음 며칠은 완전한 불통이었다. 그러다 그가 '감을 잡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느 정도 알아차리자, 그때부터 훨씬 더 거칠게, 정비소처럼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 조언이 나왔다. 처음에 했던 말과 아주 가까운 얘기였다. 아이디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없는 걸 하려 들지 말라는 거였다. 아이디어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그때는 특히 형식에 관한 얘기였다. Bajar es lo peor의 초고에서는 나르발 파트가 전부 1인칭에, 이탤릭체에, 잔뜩 환각에 취한 듯한 톤이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본 텍스트들을 재현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화자가 소설 '바깥'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결과물은 끔찍했다. 짐 모리슨이나 윌리엄 블레이크를 엉망으로 번역한 것 같았다. 끔찍, 끔찍. 후안이 "전부 3인칭으로 바꿔"라고 했다. 나는 납득이 안 됐다. 다 밋밋해질 것 같았고, 내 머릿속에 있던 그 미친 책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옳았다.

쓰고 싶은 책과 사랑에 빠지지 말고, 쓸 수 있는 책을 써라. 그것만 해도 엄청난 거다. 그러니까, 쓸 수 있는 책을 쓰는 것 말이다. 쓸 수 있는 책으로도 끝내주는 책을 만들 수 있으니까. 쓰고 싶은 책은 어쩌면 엄청난 좌절을 안겨 줄 수도 있다. 좌절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깨달음을 준 창작 작법서가 있나?

창작 작법서는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워크숍을 진행할 때 연습 문제 몇 개를 읽어 본 적은 있는데,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가드너(존 가드너의 『소설의 기술』을 말한다) 거. 그래도 책 자체를 읽은 적은 없다. 끝에 있는 연습 문제만 읽었는데, 해 보면 꽤 괜찮은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쓸모도 있고 재밌다. 하지만 솔직히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제목도 모른다. 읽은 건 그거랑 에베 우아르트의 강의록뿐인데, 그건 에베니까 읽은 거다. 그냥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문학에 대한 낭만적인 통념은 작가가 오로지 자기 상상력에 이끌려, 아무런 목발 없이 쓴다고 여긴다. 반대로 당신의 책들에는 모두 방대한 리서치가 깔려 있다. 당신의 경우 리서치는 서사 구조를 다 짜 놓으면 끝나나, 아니면 오히려 집필 과정 내내 함께 가나? 너무 많이 조사하다가 그 주제에 대한 '흥분이 식어서' 프로젝트를 중간에 접은 적이 있나?

리서치는 집필 과정 내내 함께 간다. 마지막 순간, 마지막 교정 때까지도 내가 쓰고 있는 것에 관해 계속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가끔 막판에 "아, 이거다" 싶은 게 튀어나온다. 리서치는 글쓰기와 나란히 간다. 주파수를 맞추는 거다. 그냥 존재하는 모든 참고 자료(넓은 의미로, 영화, 책, 구전 이야기까지)를 긁어모으려는 게 아니라, 대개 이미 예전부터 관심 있던 것들이다. 오컬트와 관련된 걸 쓰고 있으면 정말로 거기에 푹 빠져 있다. 영화를 보고, 그런 대화를 나누고, 거기에 공명하고, 집착하고, 타로 카드 한 벌을 들고 어디든 다닌다. 다 쓰고 나서도 물론 그 세계들이 여전히 좋지만, 거기서 멈추고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둘이 나란히 간다는 건, 그게 내 삶을 집어삼키고 내가 쓰는 것까지 집어삼키는 집착이라는 의미에서다.

쓰고 싶은 책과 사랑에 빠지지 말고, 쓸 수 있는 책을 써라.

나중에 알게 된 건, 그 걸러 내는 과정이 저널리즘이랑 좀 비슷하다는 거였다. 엄청나게 많이 알아야 하고, 그 많은 것 중에서 내 작업에 쓸모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리서치는 한편으로는 정말 재밌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메마른 일이다. 가끔은 책 한 권을 통째로 읽어서 딱 하나, 세 문단을 건진다. 그런데 그 문단들을 찾으려면 책 한 권을 끝까지 버텨 내야 한다.

내 이야기를 붙들고 그 다른 텍스트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어느 순간 딸깍 하고 맞아떨어진다. 내 경우엔 그 딸깍이 아주 미세하다. 그리고 나한텐 그게 통한다.

흥분이 식는 문제라면, 나는 아예 못 쓸 정도까지 간 적은 없다. 다만 두 번째 '진짜' 장편 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건 출간하지 않고 찢어 버렸다. 그때는 리서치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플롯은 아주 희미한데 세계관만 엄청 빽빽해서, 소설로서 작동하지 않았다.

흥분이 식는 문제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아까 말한 저널리즘 얘기와 관련이 있다.

엄청나게 많이 알아야 하는데 걸러져 떨어지는 건 아주 조금이다. 정말 진이 빠진다. 하지만 그게 내 방식이고, 나는 창작 과정이 늘 즐겁고 재밌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일이다. 고된 일이다. 일이라고 말하는 건 별로다. 일은 아니다. 고되다. 그러니까 좀 지겨운 부분도 있어야 하는 거다.

모은 정보는 어떻게 정리하나? 손으로 메모? Obsidian, Notion, Miro 같은 소프트웨어? 아니면 끝없는 Word 파일이 담긴 끝없는 폴더?

내 정보 정리 방식은 솔직히 끔찍하게 번거롭다. 그러니까 대체로 책마다 전부 밑줄이 쳐져 있다. 그리고 그 밑줄 친 부분을 메모로 옮겨 적는다. 지금은 음성 받아쓰기를 쓸 수 있지만, 오랫동안은 공책이랑 거대한 Word 파일 하나에 이것저것 줄줄이 적어 넣었다. 에휴, 엉망이다. 대체로 그렇다. 공책 하나와 Word 하나.

모든 책을 눈앞에 두고 펼쳐 보는 게 너무 좋다. 사방에 표시해 둔 책이 널린 '옛날식' 작업실이라는 그림이 너무 좋다. 보면서 "이거 너무 아름답다" 싶은데, 그러다 나이 탓인 일들이 생긴다. "내 글씨를 내가 못 알아보겠네" 같은 거(웃음). 그래서 그 '미학'은 결국 혼돈으로 귀결되는데, 아직은 어떻게든 풀어내고 있지만 솔직히 손을 좀 봐야 한다.

아직도 내 기억력을 꽤 믿는 편인데, 좋은 일은 아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자꾸 잊어버리니까 바꿔 나가야 할 것 같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어쨌든 그렇다, 완전 아날로그에 구식이다.

나는 random한 메모는 안 한다. 뭔가 떠올라서 '음성 메모'를 남기는 일은 정말 드물다. 몇 번 해 봤는데 그대로 방치됐다. 다시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 내 방식이 아니다. 지금 방식을 밀고 나가면서,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보완해 줄 어떤 질서를 더해야 한다(웃음).

문학은 고독한 예술이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다. 그만큼 틀린 말도 없다. 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사람이 곁에서 돕고 있다. 쓰는 중간에 원고를 보여 주나? 누구에게? 보여 준다면 집필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주로 보여 주나?

그런데 나한테는 그 과정이 꽤 고독하다는 거 아나? 처음을 그렇게 시작해서 첫 습관이 일종의 기본값처럼 굳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쓰는 동안에는 거의 안 보여 준다. 꽤 다 짜인 다음에야 보여 준다. 읽어 주는 사람도 많지 않다. 아주 친한 친구 몇 명이 읽어 주는데, 작가는 아니다.

보여 주는 건, 따옴표 쳐서, 아주 '업무적으로'다. 이상적으로는 늘 편집자와 일하고 싶은데, 지금은 에이전트인 마리아 린치(스페인 문학 에이전시 Casanovas & Lynch 소속)와 일한다. 초고를 끝내고 '치료'가 필요할 때는 마리아. 그다음엔 아나그라마 편집자인 실비아(세세)가 읽는다. 솔직히 그 외엔 별로 없다. 쓰는 중에? 아무도. 아무도, 정말 아무도.

쓰는 동안에는 거의 안 보여 준다. 꽤 다 짜인 다음에야 보여 준다. 읽어 주는 사람도 많지 않다.

마지막에는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원고가 크게 바뀔 수도 있다. 마리아가 읽거나 친구 중 누군가가 읽고 "이게 다 what the fuck이야"라든가 "이 소설 사실 마지막 장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왜 여기서 시작해?" 하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개입이 대대적인 변화나 전면 재검토, 혹은 무지막지한 삭제나 무지막지한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

어느 지점까지는 혼자 가야 한다. 그리고 혼자 가는 그 구간이 꽤 길다.

다른 사람의 수정 제안이나 재검토에 얼마나 열려 있나? 피드백이 도움이 되나?

많이요. 그런데 그건 제가 피드백을 요청할 때쯤이면 이미 꼭 단단하진 않더라도 어쨌든 ‘완성된’ 판자 위에 서 있기 때문이에요. 이미 사포질도 해 놨고, 초벌 칠도 끝났고, 뭐 그런 식이죠. 그러니까 아직 할 일은 산더미지만 뭔가는 이미 있는 거예요. 제가 보여줄 때는 구조도, 제가 원하는 것도, 색깔도 이미 잡혀 있어요. 그래서 그 단계에서는 피드백에 아주 열려 있어요. 그때는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있어요. 아마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미 마음이 편해졌으니까요. 모르겠어요. 자존감 문제일 수도 있고요. 내가 사기꾼 같다거나, 남들이 내 글을 대신 짜 주고 있다거나, 너무 많이 도움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거죠.

저는 제가 주도권을 충분히 쥐었던 단계를 넘어선 다음에야 피드백을 요청해요. 너무 이른 단계에서 누가 손을 대면, 제가 쓰는 글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내 아이디어가 아닌 것 같아서 불안감이 확 밀려올 것 같거든요.

언젠가 글을 쓸 때면 묘한 무아지경 같은 공간이 생겨서, 친구들이나 파트너가 당신이 "locked in" 상태라는 걸 이해해 줘야 하고, 그 상태에서 끄집어내기가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죠. 딱 그거예요. 몇 시간, 몇 시간, 또 몇 시간씩 말없이 일하고, 메시지에 답도 안 하고, 어쩌면 그다지 살갑지도 않은, "out of joint"한 상태. 글쓰기 때문에 희생했고 지금은 후회하는 게 있나요?

저는 “locked in”에 대해선 꽤 유연해요. 이를테면 하루 종일 글을 쓰다가도 저녁 약속이 있으면 그냥 밥 먹으러 가요. 별일 아니에요. 아마 저널리즘 영향이 클 거예요. 저널리즘은 ‘내려놓는’ 법을 가르쳐 주거든요. 마감에 맞춰 넘겨야 하는 글이 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글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생각, 지금 이 순간에만 뭔가가 일어나고 있고 붙잡아야 할 추상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지금 아니면 영영 못 잡는다는 생각 같은 걸 집어치우게 만들거든요.

저널리즘은 가끔 이렇게 말해요. 뭔가가 덧없고 유한하더라도 놓쳐도 괜찮다고, 어차피 내일 되찾을 수 있다고. 거짓말이에요. 내일 못 되찾아요. 그건 영감보다는 규율의 문제예요.

희생이라. 글쎄요… 휴. 그런데 글쓰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기자 일, 그리고 지적인 노동 전반 때문이죠. (긴 침묵) 몸을 쓰는 것과 관련해서 정말 후회하는 게 많아요. 이를테면, 저 수영을 못해요(웃음). 아무도 안 가르쳐 줬어요. 해 보고 싶었던 게 많아요. (긴 침묵) 수영, 테니스. 그것도 제대로요, 주말에 기분 전환으로 치는 거 말고요. 좀 그런 식의 삶을 살아 보는 거요. 운전, 차 몰고 여행 다니기. 글쓰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긴 침묵) 기자 일이라는 게 몇 시간씩 읽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영화 보고, 리뷰 생각하는 일이잖아요. 그런 결과는 전혀 상관없는 걸 잔뜩 해 봤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축구 경기를 더 많이 본다든가, 몰라요. 이것저것요. (긴 침묵) 네. 대충 그런 거예요.

언젠가 디에고 카푸소토는 프로그램 「Cha Cha Cha」(1992-1997)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텔레비전에는 즉흥연기에 관한 신화가 있어요. 우리가 방송국에 와서 알약 두 개 털어 넣고 아무거나 막 한다고들 생각하죠. 근데 사실이 아니에요. 뭐, 알약 두 개 먹는 건 맞는데, 즉흥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어쨌든 약은 끝나고 먹어요." 다른 관점에서, 헤어초크는 자기가 구상한 것이 편집 단계뿐 아니라 촬영 현장에서도 변해 버리는 일이 많다고 했죠. 당신이 쓴 것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우리가 보는 최종 결과물에 실제로 남나요? 퇴고에는 얼마나 꼼꼼한 편인가요?

그렇게 많지 않아요. 퍼센트로 말하자면 한 50퍼센트쯤요.

보통 제겐 먼저 쓰는 핵심 장면이 서너 개쯤 있는데, 그건 대개 살아남아요. 이게 좀 페티시 같은 문제이긴 해요. 나중에 무슨 이유로든 잘라 내거나 빼야 할 때 잘 안 되거든요. 제일 마지막까지 버티는 장면들이에요. 그 장면들은 건물로 치면 기둥 같은 거예요. 끝까지 남든가, 아니면 그 주변을 둘러싸며 글을 쓰다가 결국 뺄 수도 있지만 어떤 이유로든 거기 있어야 했던 장면들이죠.

네, 많이 잘라요. 많이 빼요. 저는 엄청… 길게 쓰는 타입이에요. 이해하려면 정보랑 전개를 어마어마하게 써 봐야 해요. 제 초고를 보면 전부 거기 다 있어요. 온갖 여담, 디테일, 묘사. 말하자면 아주 바로크적인 글이죠. 그다음에 조금씩 쳐내는 거예요. 서랍에서 전부 꺼내 놔야 해요. 숟가락 일곱 개, 칼 다섯 자루, 필요할 것 같은 건 전부요. 그걸 세고 늘어놓고 첫 버전에서 재고 조사를 한 다음에 쳐내기 시작하는 거죠.

퇴고할 때 꼼꼼하진 않아요. 처음엔 꽤 무자비해요. 일단 걷어내고, 걷어내고. 그래도 여전히 꽤 빽빽하게 남는데, 전 빽빽한 글이 좋아요. 도노소도 좋아하고, 무히카 라이네스도 좋아하고, 서던 고딕 작가들도 좋아해요.

예를 들어 ‘빙산’식 초고 같은 건 저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웃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을 언급한다).

창작 과정을 조사, 집필, 퇴고 세 단계로 나눈다고 해 봅시다. 어느 단계가 제일 좋고 어느 단계가 제일 싫은가요? 이유는요?

계속 바뀌어요. 지금 제일 좋은 건 퇴고 단계예요. 자리에 앉아서 “자, 제대로 한번 보자,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 하는 거죠. 안 될까 봐 겁나지 않아요. 잘될 거라고 자신하는 오만한 의미가 아니라, 안 되면 그걸 놓아주고, 바꾸고, 손대고, 되게 만들어 볼 마음의 여유가 더 있다는 뜻이에요. 안 돼도 덜 우울하고, 덜 낙담해요.

집필은, 지금 기준으로는 두 번째요. 조사랑 같이 오긴 하지만요. 집필은 더 모험적이지만 동시에 더 진이 빠져요. 사실 셋 다 정말 좋아해요.

다만 퇴고에는 결승선에 다다른 쾌감이 있어요. 다 왔다, 하는. 완전히 다른 순간이죠.

젊은 작가들, 그리고 그다지 젊지 않은 작가들 사이에도 도는 망령이 하나 있죠. 갑작스러운 "영감"의 고갈, 그리고 백지. 이 주제에 관해선 당신에게 물어볼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쉬지 않고 쓰니까요. 그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젊은 작가에게 뭐라고 말해 주겠어요?

저한테는 ‘백지’가 안 와요. 영감이 없거나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피곤하거나, 다른 걸 하고 싶거나, 글쓰기의 재미와 즐거움을 다시 찾을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거죠.

굳이 조언 비슷한 걸 해야 한다면, 아주 큰따옴표 쳐서 말하는 건데, 제 경우에 ‘막힌 게 뚫리는’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눌 수는 있어요. 저는 막힌 게 뚫릴 때 늘 삶과 부딪히기보다는 독서랑 음악이랑 관련이 있어요. 그 공백을 여는 열쇠를 찾으려 하는 거죠. 열정을, 목소리를 다시 찾는 건데, 남들의 목소리 안에서 찾는 거예요. 그래서 시를 좋아해요.

제게 제일 도움이 되는 건 그런 이상한 방식으로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게 좀 위축되게 만드나요? 다시는 정곡을 찌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나요, 아니면 오히려 계속 작품을 낼 에너지가 새로 샘솟나요?

엄청나다고요? 전 그렇게까지 느끼진 않아요. 안에서 느끼는 거랑 밖에서 보는 거랑은 달라요. 솔직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더 많이 지켜봐지는 느낌은 있죠. “아, 책 나오면 이러쿵저러쿵 더 말이 많겠구나” 싶은. 이상한 건 그게 별로 안 아프다는 거예요. 강도가 약하다고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분명 거기 있긴 한데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아주 가볍게 느껴져요. 늘 곁에 있는데, 아주 가벼운.

저는 막힌 게 뚫릴 때 늘 삶과 부딪히기보다는 독서랑 음악이랑 관련이 있어요. 그 공백을 여는 열쇠를 찾으려 하는 거죠.

『그늘진 사람들을 위한 햇볕 드는 곳』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사람들, 뭐 몰라요,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따옴표, 어쩌고저쩌고) “자, 이번엔 뭘 들고 나왔나 보자” 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 책은 꽤 두들겨 맞았어요. 전 별로 안 읽는데 다들 전해 주더라고요. 예전 수준이 아니라는 식의 말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제가 ‘해외용’으로 쓴다고 했어요. 글에서 어떤 거리가 “온세에” 있다고 굳이 설명했다는 이유로요(웃음). 다들 히스테리 그 자체였죠.

그리고 “과대평가됐다” 어쩌고 하는 얘기가 시작됐죠.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해요. 저도 제가 하는 게 엄청 많이 알려졌다고 생각하고, 저랑 얘기하려고 안달인 사람들이나, 언론 보도나, 영화로 각색된 작품이 몇 개 있다는 것도 느끼거든요. 내가 나 아니었으면 나도 나한테 좀 질렸을 거예요(웃음). 어떤 아티스트한테 그런 일이 생기면 저도 그래요. "어딜 가나 나오네, 이제 얼굴도 보기 싫다."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거슬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사람들이 과대평가됐다느니 “못 봐주겠어, 어딜 가나 나와” 같은 말을 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서 기분이 좀 안 좋은 것도 사실이에요. 뭐 어쩌겠어요. 맞는 말이에요, 저라도 그럴 테니까.

지금으로선, 그리고 제가 작업하고 있는 것에 있어서는, 이런 상황이 크게 방해가 된다고 느끼진 않아요. 그런데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아요? 제가 나이가 있어서예요. 주목을 확 받기 시작한 건 팬데믹 이후였어요. 애초에 뜨기엔 이상한 시기였죠.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저는 저대로 편집증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게 대충 2022년쯤인데(팬아트, 영화, 라라인이 연락해 오고, 무슨 상인가도 받고), 그때 전 이미 거의 쉰 살이었어요. 그리고 2016년에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나왔을 때, 그게 아나그라마에서 처음 나온 책이었고 거긴 영향력이 다른 출판사였는데, 그때도 전 이미 마흔두 살이었어요. 어른이었죠. 그리고 그 어른이 되기 전까지 화려함이라곤 하나도 없이 일만 하며 살았어요. 그러면 관점이 엄청 달라져요. 정신이 안 팔려서만은 아니에요, 그건 몇 살이든 팔릴 수 있으니까. 오랫동안 그게 내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거기 적응하려면 아직 한참 걸릴 거예요.

글을 쓰려는 사람은 누구나 훔칩니다. 당신은 어디서 훔치나요? 훔치는 게 왜 중요할까요?

저는 주로 음악에서, 가사에서 훔쳐요. 네, 그거예요. 음악이라는 세계, 가사, 이야기. 그게 첫 번째 영역이에요. 그다음엔 좋아하는 책들에서 많이 훔치고요. 이쯤 되니 저 자신한테서도 훔치는 것 같아요.

훔치는 건 중요해요. 하지만 출처를 밝히는 것도 중요해요. 내가 가진 게 순전히 내 것이라거나, 아무 영향도 안 받았다거나, 남들보다 더 흥미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우리는 모든 것과 소통하고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게 자기 작업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예요.

저는 주로 음악에서, 가사에서 훔쳐요. 네, 그거예요. 음악이라는 세계, 가사, 이야기. 그게 첫 번째 영역이에요.

독창성에 대한 집착은 진짜 미친 짓이에요. 어떤 종류든 재능이 있으면, 대단한 재능이 아니어도 그냥 재능이 있고, 어떤 식으로든 개성이 있으면, 그건 드러나게 돼 있고 다른 무엇과도 닮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니까. 이제 헛소리하는 것 같네요(웃음).

(몇 분간 말을 멈춘다. 호주에 있는 집에서 사진 몇 장을 보내온다)

영화 세 편. 음반 세 장.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토드 헤인스의 「벨벳 골드마인」. 그리고… 고전으로 가 볼게요. 거스 밴 샌트의 「아이다호」.

음반 세 장은 끔찍하게 잔인한데, 한번 해 보죠.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Live Seeds.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의 바나나 앨범. 세 번째. 너무 어렵다. Impossible. 또 고전으로 가죠. 롤링 스톤스의 Exile on Main St.

글을 쓰기 시작하고 싶다면 뭘 해야 할까요? 왜 용기를 내야 할까요?

왜 용기를 내야 하냐니, 이상한 질문이네요. 무슨 위험이라도 있다는 전제잖아요. 제가 왜 시작했는지 생각해 보는 중이에요. 시작할 때 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정말 아무것도요. 요리도 못 하고, 운전도 못 하고, 그림도 못 그렸어요. 기타를 쳐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고요. 아마 세상엔 자기가 잘한다고 느끼는 게 하나도 없어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그 모든 걸 어디에도 쏟아낼 데가 없어도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이 있겠죠(긴 침묵). 근데, 전 아니었어요.

지금 창밖으로 어떤 사람을 보고 있어요. 옆집 정원에서 식물을 돌보고 있어요. 그리고 생각하죠. 저 사람은 우선 내가 할 줄 모르는, 시간이 엄청 드는 일을 하고 있고, 아마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모든 것, 사람이 자기 자신과, 혹은 대화 상대가 무엇이든 그것과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 같은 걸 쏟아붓고 있겠구나.

저는 그걸 글쓰기에 쏟아야 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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