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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은 미래형 서부극이다

<매드 맥스>부터 <더 로드>까지, 영화는 세상의 종말을 어떻게 상상해 왔을까. 책 『영화와 가능한 미래들』 미리 보기.

모든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은 미래형 서부극이다
이 글은 Cine y Futuros Posibles에서 미리 발췌한 것이다. 24 Cuadros 매거진의 최신간인 이 책은 영화(시네마토그래프 발명자 중 한 명인 루이 뤼미에르에 따르면 "미래가 없는 발명품")가 미래를 상상해 온(그리고 여전히 상상하고 있는) 다양한 방식을 분석한 비평 글들을 모았다. 책은 여기에서 구할 수 있고, 우편으로 받아 보려면 여기로.

고독한 총잡이가 어느 사막이라 해도 상관없을 사막을, 어느 시대라 해도 상관없을 시대에 떠돈다. 그는 말없이 겨누고 쏘고, 능숙하게 죽인다. 그러고는 작은 수첩에 알 수 없는 말들을 적어 넣는다. 적대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의 황무지를 가로지르고, 한 사교 집단과,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 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창백한 카우보이와 맞선다. 사막의 도적들과 싸우고, 성경 속 역병과 재앙을 견디고, 계시와 코즈믹 호러의 환영에 시달린다. 총잡이는 나아가고,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황무지가 그의 집이다.

이것이 미국계 아르헨티나 작가 마이크 윌슨의 소설 『돌 속에 잠든 신』(2023)의 무대이고, 독자로서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야기는 과거에 벌어지는가, 아니면 포스트아포칼립스의 미래에 벌어지는가? 총잡이가 가로지르는 곳은 우리 세계인가, 아니면 대체 우주인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인가, 아니면 부서진 행성의 폐허인가? 작가는 이런 문제들을 굳이 해명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마 『돌 속에 잠든 신』이 형이상학적-묵시록적 웨스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와 펄프 문학이 100년 넘게 가르쳐 왔듯, 사막은 웨스턴 같은 장르와 포스트아포칼립스 SF 같은 하위 장르가 가장 사랑하는 무대다. 그러니 포스트아포칼립스 풍경과 구별되지 않는(메마르고, 살 수 없고, 황량한) 공간을 떠도는 말 탄 총잡이의 자연 서식지는 사막일 수밖에 없다. 윌슨은 소설의 장르와 시공간을 독자의 상상력에 맡김으로써 이 모호함을 가지고 논다.

Cine y Futuros Posibles, 24 Cuadros 매거진의 최신간.

돌려 말하지 않겠다. 내 가설은 모든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이 결국 미래주의적 웨스턴이라는 것이다. 차이라면 하나는 문명의 시작을, 다른 하나는 문명의 끝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웨스턴은 "문명화된" 동부가 자본주의 이전의 "야만적인" 서부를 정복하는 과정, 자본주의의 확장, 근대 문명의 탄생을 그린다. 반면 사막을 배경으로 한 포스트아포칼립스 SF는 어떤 재앙 이후 문명이 붕괴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 이미지들(카우보이, 무법자, 야만적 인디언이 사는 북미의 사막, 그리고 약탈자들이 들끓는 핵전쟁 이후 혹은 문명 붕괴 이후의 사막)은 대중의 상상 속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모든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은 결국 미래주의적 웨스턴이다. 차이라면 하나는 문명의 시작을, 다른 하나는 문명의 끝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들은 이런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맥락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핵폭발의 정확한 순간을 보여주는 오프닝 이미지가 필요했다. 〈소년과 개〉(L. Q. 존스, 1975), 〈매드 맥스 2〉(G. 밀러, 1981), 〈북두의 권〉(T. 아시다, 1986), 〈Hell Comes to Frogtown〉(D. 잭슨, R. 카이저, 1988), 〈아키라〉(K. 오토모, 1988), 〈싸이보그〉(A. 퓬, 1989)(몇 가지 예만 들어도) 모두 이런 이미지의 변주로 시작하며 처음부터 자신의 허구 세계를 설명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과잉 설명적인 장치는 필요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대체로 형편없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만이 의례적인 핵폭발로 시작한다.

멸종해 가는 이 이미지들을 제쳐 두면,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 대다수의 도입부가 여느 고전 웨스턴의 시작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공간을 설정하는 거대한 익스트림 롱숏, 인물을 왜소하게 만드는 최면적인(그리고 살기 힘든) 풍경에 짓눌린 인물들, 렌즈에서 너무 멀리 있거나 카메라를 등지고 있거나 역광 속에 있어 분간되지 않는 몸과 얼굴, 태양과 숨 막히는 더위에 완전히 집어삼켜진 인간들. 풍경(대개 메마른 자연 경관)과 극단적인 기후는 서부극에서도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에서도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막의 평원, 먼지, 태양, 더위는 인간만큼이나 주인공이어서, (안티)히어로나 무법자 무리가 처음 등장하기 전에 사막이나 중천에 뜬 해를 담은 숏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소년과 개〉, 〈매드 맥스 3〉(G. 밀러, 1985), 〈일라이〉(휴즈 형제, 2010) 같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의 도입부는, 고전 세 편을 예로 들자면 존 포드의 〈역마차〉(1939)와 〈수색자〉(1956), 혹은 세르조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의 도입부와 다를 바 없다.

적대적인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 홀로 혹은 동물(말이나, 없으면 개) 한 마리와 함께 거대한 메마른 계곡을 떠도는 노련한 전사인 안티히어로는 웨스턴과 포스트아포칼립스 SF 모두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두 허구의 시대, 두 상상의 순환(하나는 열림, 하나는 닫힘)을 잇는 원형이며, 이 두 순환은 끝없는 원을 이룬다. 우리가 아는 미국 문명의 탄생과 붕괴라는 원 말이다. 순환 모델과 빅 바운스 이론에 열광하는 우주론자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역전 과정이 시작되어 모든 물질과 시공간이 무한히 뜨겁고 밀도 높은 특이점으로 수축하고, 그것이 대붕괴(빅 크런치)로 끝나면 다시 대반동이 일어나 또 다른 빅뱅을 낳고 거기서 새로운 우주가 태어난다고(그리고 이것이 계속 반복된다고) 추측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네필들은 웨스턴과 포스트아포칼립스 SF라는 장르를 팽창, 수축, 무한한 붕괴가 이어지는 연속적 순환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순환적 기원 신화가 서부의 야만적 변경에서 시작해 핵전쟁 이후의 황무지에서 끝난다고 해 보자.

  • 팽창: 태초에는 모든 것이 혼돈이다. 폭력, 영토 분쟁, 내전, 원주민의 습격, 살인자와 약탈자 무리. 웨스턴의 화자들은 이 원초적 혼돈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주된 문명화의 동력으로 삼아서. 이는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면서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 조상 대대로의 땅을 빼앗고, 근대적 철도를 통해 확장을 꾀하는 정치·경제 철학이다.
  • 수축: 하지만 이미 150년 전 마르크스가 경고했듯, 자본주의가 내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갈수록 깊어지는 위기를 만들어 내는 뚜렷한 경향을 지닌 불안정한 체제로서 그 안에 자기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묵시록은 언젠가 반드시, 피할 수 없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아마 자본주의의 가장 큰 모순이자 최후의 기폭제는 유한한 자원의 행성에서 무한한 성장을 이루려는 그 탐욕스러운 시도일 것이다. 다시 말해, 끊임없는 확장과 축적이라는 자본의 논리는 천연자원의 과잉 착취를 부추기고, 이는 생태 위기, 환경 재앙, 자원 전쟁, 지속적인 오염, 그리고 우리를 멸종으로 몰아가는 기후 변화를 낳는다.
  • 붕괴: 자본주의가 품고 있는 이 자기 파괴적 폭탄을 감안하면 포스트웨스턴의 붕괴(즉 기후/핵 묵시록)는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지배 체제의 몰락 이후의 대안을 상상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 보인다. 일종의 "상상력의 마비"로, 그 탓에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 대다수는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야만, 홉스적 전쟁, 문명 없는 미개함뿐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혹은 왜 우리는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는가

우루과이 예술가 페르난도 로페스 라헤는 자신의 책 『Madmaxismo』(2021)에서 우리의 상상 속에는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한 이미지가, 정지된 것이든 움직이는 것이든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깨운다. 반면 묵시록, 세계의 종말, 좀비가 점령한 세계, 공교롭게도 인간을 닮은 적대적 외계인에 관한 이미지는 넘쳐나며, 이것들은 오직 행성 위 생명의 종말만을 가리킨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언제나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종말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로 우리를 이끄는 파괴적이고 묵시록적인 상상에 종속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경제 체제일 뿐 아니라 그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집단적 상상 속에 깊이 뿌리내린 생각이다. 이는 우리의 현재(그 자체로 이미 꽤 디스토피아적인)와 다른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전반적인 무력감, 일종의 상상력의 마비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대안을 상상하는 픽션이 없는 이유는 (이 문장이 너무 반복되다 의미를 잃지 않기를 바라며)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이 무력감은 특히 사막을 배경으로 한 묵시록 픽션에서 두드러진다. 그 작가들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생각할 때 그 직접적인 결과로 세계의 종말을, 적어도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듯하다. 행성의 사막화,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전쟁, 적자생존이 아닌 가장 폭력적이고 잔혹한 자의 생존, 극단적인 오염, 그리고 완전히 적대적인 기후.

우리는 언제나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종말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로 우리를 이끄는 파괴적이고 묵시록적인 상상에 종속되어 있다.

페르민 로드리게스는 에세이 『국가를 위한 사막』(2010)에서 사막을 역사에 의해 결정화되고 조직된 지질학적·생물학적·사회적·언어적 물질들의 퇴적층이라고 정의한다. 로드리게스에게 사막은 언제나 온갖 종류의 선언문을 만들어내는 가상 이미지들의 몽환적 실험실 같은 것이었고, 그는 이렇게 묻는다. “풍경으로 번역되기를 거부하는 땅의 헐벗음, 단조로움, 소박함과 대조를 이루는 이 가상의 힘, 이 상상의 동요는 대체 어디서 오는가?”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에서 그 가상의 힘과 상상의 동요는 사막이라는 공간 자체의 속성으로 정당화된다. 헐벗은 건조함, 단조로움, 그곳에 깃든 몇 안 되는 생명체, 그리고 극도로 적대적인 기후가 사막을 종말 이후 등장하는 디스토피아들의 단골 무대로 만든다. “어쩌면 그 박탈, 상상력을 시험에 들게 하던 그 <<풍경의 부재>>야말로”, 로드리게스는 말한다, “수많은 이미지가 지평선 위로 일렁이게 만든 조건이자 토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막을 으스스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풍경의 부재다. 설령 그것이 자연 사막이라서, 당연하게도, 인공 사막이나 핵 이후의 땅에는 차고 넘치는 자본주의의 폐허가 없다 해도 말이다. 마크 피셔는 으스스함의 감각이 닫힌 공간이나 사람이 사는 공간, 가정적인 공간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부분적으로 빠져나간 풍경에서 피어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썼다. 으스스함은 부재의 결여 혹은 현존의 결여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곳에 무언가가 있거나, 무언가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을 때 으스스한 감각이 생겨난다. 피셔는 두 번째 유형의 으스스함(현존의 결여)의 예로 폐허나 다른 버려진 구조물을 감싸는 감각을 든다. “포스트아포칼립스 SF는 그 자체로 늘 으스스한 장르는 아니지만, 으스스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16)에서 이렇게 쓴다. 버려진 마을은 환상 열석과 마찬가지로 으스스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질문들을 촉발한다. 저 폐허, 저 사라짐을 낳으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 어떤 존재가 거기에 관여했을까? “풍경이 있어야 할 곳에 왜 풍경이 없는가?”라는 질문은 사막을 으스스함과 곧장 연결하고, “무언가가 있어야 할 곳에 왜 아무것도 없는가?”라는 질문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사막(인간이 부분적으로 빠져나간 폐허를 품은)을 이중으로 으스스한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그렇다면 강렬한 으스스함을 내뿜는 이 땅들의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끌어당기는 걸까? 우리는 왜 이 포스트아포칼립스 사막을 오늘날 수많은 픽션의 무대로 상상하길 좋아할까? 세상의 종말이라는 관념은 왜 이토록 우리를 매혹하는 걸까?

Cómo el apocalipsis bíblico modela la imaginación política
¿Ateo, nihilista o devoto de Gilda? No importa: tu mente política está moldeada por el apocalipsis bíblico. Cómo las ficciones y el deseo de un final “con sentido” estructuran nuestra realidad. ¿Vivís esperando que se venga el fin? Descubrí por qué.

대안은 없는가?

철학자 티머시 모턴은 하이퍼객체를 끈적하고(관계 맺는 사물들에 스며든다) 비국소적인(그 어떤 국소적 발현도 하이퍼객체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고 극히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다) 존재로, 인간의 척도와는 완전히 다른 시간성을 지닌 채 시공간에 대규모로 분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 실제 범위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설 만큼 거대한 현상이며, 우리의 측정과 통계 바깥에 존재하기에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들이다. 블랙홀, 생물권, 폴리스티렌, 태양계가 모두 하이퍼객체다. 모턴은 저서 『하이퍼객체』(2013)에서 슈퍼마켓에서 두 사람이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교육용 예시로 들며, 이제는 날씨에 관한 일상적인 대화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구온난화의 존재가 그림자처럼 대화를 어둡게 드리우며 기묘한 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이퍼객체(이 경우 지구온난화)가 “날씨 참 이상하네요”로 시작하곤 하던 가벼운 대화를 망쳐버린 것이다. 날씨에 관한 대화라면 아마 언젠가는 누군가 지구온난화를 언급할 테니까. 설령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먹구름처럼” 대화 위를 맴돌 것이다. 모턴은 일상의 수사와 가벼운 대화에 생긴 이런 균열이 인간 의식에서 일어나는 아주 깊은 존재론적 전환의 징후, 일종의 존재론적 도구의 업데이트라고 단언한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대다수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며, 미래에서 우리를 노리는 위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느낄 수 있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언정 극한의 더위(그 전체 중 한 단면에 불과한)에 시달릴 때면 그것이 우리 사이에 있다는 걸 누구나 안다. 다른 모든 하이퍼객체처럼 끈적하게 우리를 에워싸고 들러붙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잠들어 있다가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나 지구의 조건을 영원히 바꿔놓겠다고 위협하는 러브크래프트적 존재다. 영원히 잊기로 합의했던 과거의 하이퍼객체, 팬데믹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불과 몇 달 만에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다시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그러니 오늘날의 디스토피아-아포칼립스 서사가 원자력 시대의 핵 재앙에 대한 공포나, 냉전 시기 대립하던 강대국들의 핵전력이 낳은 MAD(상호확증파괴) 독트린에 대한 두려움보다 생태학살이 초래한 환경 재앙과 생태계 붕괴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기후변화는 잠들어 있다가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나 지구의 조건을 영원히 바꿔놓겠다고 위협하는 러브크래프트적 존재다.

핵폭발로 인한 종말이든 생태계 붕괴로 인한 종말이든, 재앙 이후에 남는 것은 황무지, 즉 포스트아포칼립스 사막이다. 두 종말의 근본적인 차이는 속도에 있다. 원자폭탄은 단 몇 분 만에 지구의 상당 부분을 불모지로 만들 수 있지만, 오존층 파괴나 가뭄은 아주 긴 고통의 과정일 수 있다. 사막화는 두 경우 모두 완성되며, 다만 그 속도가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포스트아포칼립스 SF 영화 〈소년과 개〉와 〈북두의 권〉은 전쟁으로 인한 핵폭발로 시작해 지구를 순식간에 인공 사막으로 바꿔놓고, 그렇게 약탈자 무리와 야만적인 전사들이 부서진 행성의 잔해를 두고 싸우는 새로운 세계의 상태를 설명한다. 우리,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 지금까지 당첨된 건 느릿느릿한 종말이다. J. G. 밸러드의 소설 『가뭄』(1965)이나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에서처럼 말이다. 『가뭄』은 산업 폐기물에서 나온 포화 고분자 막이 바다를 뒤덮어 물의 증발을 막는 바람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 지구가 서서히 사막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국 작가는 문명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폭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극한의 더위와 물 부족에 맞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겪는 느긋한 고통과 변화, 적응의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사막은 언제나 이런 종류의 판타지를 상상하기에 이상적인 무대다. 〈칠드런 오브 맨〉은 불임 팬데믹으로 인류가 (사회 붕괴를 거쳐) 피할 수 없는 멸종에 직면한 디스토피아적 2027년을 배경으로 한다. 사실 그 느린 종말은 지구상의 마지막 아이가 태어난 18년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방랑벽

페르민 로드리게스가 아르헨티나의 사막을 “흩어져 있지만 고독하지 않은 땅, 역설적으로 떠돌이 부족들과 카우디요의 공포 아래 놓인 공간을 질주하는 유목 기마 무리들로 북적이는 고독”이라고 정의할 때, 그는 마치 〈매드 맥스〉 시리즈나 코맥 매카시의 2006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더 로드〉(존 힐코트, 2009) 같은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의 서사 공간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작품의 으스스한 사막은 문화가 뿌리째 뽑히고 가장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 이야기의 무대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모두가 찾을 수 있으리라 희망하는 약속의 땅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소규모 방랑자 무리들 말이다. 앞서 말했듯 이런 픽션에서 늘 되풀이되는 것은, 지배적인 체제(즉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서로가 서로의 포식자가 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말 그대로 서로를 잡아먹거나, 가장 비뚤어진 욕망을 채우는 데 서로를 이용하거나. 모든 것이 대안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런 픽션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요소는 이동이다. 인물들을 공간 속에서 전진시키는 동시에 플롯을 밀어붙이는 이중의 움직임. 『가뭄』에서도, 〈더 로드〉와 〈매드 맥스〉에서도 생존자들은 끝없는 디아스포라 속에서, 뿌리 뽑힌 채, 영원한 이동 속에서 살아간다. 얼마 안 되는 소지품을 이리저리 옮기며 목숨 걸고 지킨다. 이 포스트아포칼립스 미래에서 집은 더 이상 피난처도 코스모스도 아니고, 가스통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1957)에서 쓴 것처럼 “우리의 인공 낙원, 세상 속 우리의 구석, 우리의 첫 우주”도 아니다.

이런 픽션에서 늘 되풀이되는 것은, 지배적인 체제(즉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서로가 서로의 포식자가 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바슐라르의 말처럼 이상적인 집이 주는 가장 귀한 혜택이 우리의 휴식을 지켜주고, 평화롭게 꿈꾸게 하고, 꿈꾸는 자를 보호하는 것이라면, 포스트아포칼립스 픽션에서 꿈은 산산이 끊긴다(사람들은 잠을 거의 못 자고 설치며, 늘 겁에 질린 채 낯선 소리 하나에도 곤두서 있다. 한마디로 “평화롭게 꿈꾸기”와는 정반대다). 집이 더 이상 우리의 인공 낙원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건물 안에서 살기를 택한 소수는 포위당하고 폭력에 시달린다. 마치 그 허구의 세계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문화의 일부가 된 “집”이라는 개념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해 차라리 잊고 싶은 사회 질서의 기억을 그들에게 떠올리게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나아가고, 유토피아를 걸어갈 핑계 삼아 움직인다. 이런 미래에서는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편이, 심지어 앞서 언급한 몇몇 영화에서처럼 한데서 노숙하는 편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은 멈춰 서는 것, 어떤 건물에 정착하는 것에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장르의 많은 주인공들이 도로와 고속도로를 진짜 집으로 삼는다. 매카시의 소설에서도, 존 힐코트의 영화 각색에서도 도로는 유일하게 반복되며 이어지는 공간이다. 인물들은 그 길을 따라 걷고, 잠깐의 우회 끝에 다시 그 길로 돌아온다. 늘 일시성과 익명성의 공간, 기억 없는 장소(마르크 오제가 “비장소”라 부른, 익명성의 공간)로 여겨지던 고속도로와 국도와 도로가 이 픽션들에서는 집이자 코스모스, 도로-세계가 된다. 초근대성과 후기 자본주의가 비장소를 생산한다면, 종말은 그 개념을 재정의하고 등식을 뒤집는다. 이 미래에서는 집이야말로 비장소, 기억 없고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공간이 된다.

세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의 도로다

〈매드 맥스〉 시리즈는 영화사에서 가장 전형적인 포스트아포칼립스 허구 세계다. 시리즈 첫 작품(〈매드 맥스〉, 1979)은 종말 이전의 기원 신화다. 즉 주인공 맥스 로카탄스키가 어떻게, 왜 '미친 맥스'가 되는지를 그리는 동시에, 종말 직전의 순간들, 몰락과 부족적 폭력 속으로 가라앉는 사회의 느린 붕괴를 보여준다. 몇 안 되는 법을 지키는 수호자들이 있긴 하지만, 도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며, 잠재된 모든 폭력을 품은 채 공포와 살인이 자라나는 비옥한 땅이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도로와 그 가장자리가 아닌 곳에서 죽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매드 맥스 2: 로드 워리어, 1981)부터 폭력에는 더 이상 경계도 한계도 없다. 인물들이 어디로 가든 사고와 죽음이 기다린다. 도로와 나머지 풍경의 구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행성 전체가 끝없는 길, 하나의 도로-세계가 된다. 인물들은 쉴 새 없이 도로 위를 떠돌고, 그 도로가 곧 그들의 집이다. 건물에 터를 잡고 살려는 자(가령 로드 워리어의 임시변통 정유 시설)는 포위당하고 짓밟힌다. 시리즈 두 번째 영화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관념은 더욱 짙어진다. 석유가 바닥나자 기업들은 생산을 멈추고, 기계는 꺼지고, 경제는 정지한다. "연료가 없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입부의 내레이션이 말한다. 영화는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말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암시한다. "그들의 세계는 무너졌고, 도시들은 폭발했다. 약탈의 폭풍이, 공포의 돌풍이 몰아쳤다. 인간이 인간을 먹었다. 도로는 끔찍한 악몽이 되었다." 홉스적 전쟁이 지배하고, 주인공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안티히어로이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조지 밀러는 포스트아포칼립스가 하나의 스펙터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곡예와 폭력의 묘기, 괴상한 인물들로 가득한 스펙터클 말이다. 로드 워리어 이후 매 작품마다 전쟁을 쇼로 선포하는 사회자가 등장한다. 여느 TV 진행자나 서커스 사회자 못지않은 거창함과 능청을 갖춘 채로. 메가폰으로 악당을 찬양하며 외쳐 대는 매드 맥스 2의 토디, 매드 맥스 3: 비욘드 썬더돔(1985)에서 돔 안의 죽음의 결투를 알리는 닥터 딜굿,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 불을 뿜는 기타로 사막의 둠 메탈을 연주하며 전투를 독려하는 눈먼 기형의 기타리스트 코마-두프 워리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에서 바이커 무리의 우두머리 디멘터스의 등장을 알리는 전령 스메그.

그런데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서사화하던 조지 밀러의 경향은 비욘드 썬더돔 후반부에 이르러 바뀌기 시작하는 듯하다. 영화 초반, 우리는 원시적 자본주의를 통해 문명을 재건하려는 첫 시도를 목격한다. 바터타운. 상품과 서비스, 사람까지 사고팔고 맞바꾸는 교역 마을이자 스쳐 지나가는 비장소다. 사설 경비를 거느리고 판옵티콘식 탑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지도자가 있고, 고용주들이 있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착취당하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하지만 한편에는 서로 협력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아이들 무리도 있다. 그리고 결말은, 빠질 수 없는 도로 위의 전투가 끝난 뒤 되살아나던 그 원형 자본주의 사회가 다시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터타운은 파괴되고, 미래와 희망은 한 젊은 여성이 이끄는 아이들의 공동체에 맡겨진다. 밀러가 비욘드 썬더돔에서 쭈뼛쭈뼛 스케치했던 그 대안은 30년 뒤 분노의 도로에서 마침내 온전한 형태를 갖춘다. 이제 전쟁은 석유가 아니라 물을 두고 벌어진다. 맥스는 여전히 끝없이 떠도는 개인주의적 안티히어로지만, 결말은 밀러가 제시하는 대안을 분명히 보여 준다. 페미니즘 혁명이자 계급 혁명. 악당-군주의 머리를 반쯤 뜯어낸 여전사가 이끄는 혁명이다. 그녀는 빨간 깃발과 검은 깃발(아나르코생디칼리슴을 상징하는 색)이 펄럭이는 차를 타고 민중에게 돌아와, 몰락을 환호하는 민중 앞에 죽은 왕을 내보인다. 그리고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요새 꼭대기로 올라오게 하고,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물을 푼다. 낡은 체제의 대안은 공동체적이고 페미니즘적일 수 있으며, 어쩌면 계급 없는 사회가 싹틀 수도 있다고 이 호주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낡은 체제의 대안은 공동체적이고 페미니즘적일 수 있으며, 어쩌면 계급 없는 사회가 싹틀 수도 있다고 이 호주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그다음 밀러는 시리즈의 다음 작품에서 재확인될 결정을 내린다.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되 단절의 순간, 즉 유토피아가 막 시작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이야기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그 유토피아는 어차피 관객이 원한다면 관객의 상상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 잃어버린 유토피아는 (현재까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퓨리오사에서 그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밀러는 미래로 모험을 떠나는 대신 과거를 돌아보는 쪽을 택했고, 분노의 도로의 속편이 아닌 프리퀄을 찍었다. 아르헨티나 작가 로베르토 추이트 로가노비치는 학술 논문 「동시대 SF 영화 연구를 위한 노트(2008-2022)」에서 이런 움직임을 '전방으로의 도주'라고 부른다.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서사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갑작스레 끝나 버린다는 것이다. 수백 편의 영화를 근거로 로가노비치는 동시대 디스토피아 SF 영화의 압도적 다수가 기존 지배 질서의 파괴나 혁명 운동의 승리로 서사의 아크를 마무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정치적·경제적·착취적) 권력의 공백, 혹은 (환경적·전쟁적·생물학적) 위기의 종식이다. 질서가 뒤집힌 뒤에 남는 것은 오히려 흐릿하고 짧다.

(…) 적대적 지도자가 죽은 뒤, 지배적 억압 기구가 해체된 뒤, 가혹한 규범이 효력을 잃은 뒤, 영화들은 앞으로 건설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라는 형상 아래 갑작스럽게 막을 내린다. 그리하여 새로운 SF 서사의 최종 상태는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현대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영화 애호가이자 문화의 행위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은, 지배 체제의 붕괴 가능성에 맞설 대안을 상상하고 펼쳐 보이라고 서사 예술에 요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왜 (거의) 아무도 혁명 이후를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는지 이해하려 애쓰고, 지금의 이 상상력의 마비가 다가올 아포칼립스의 전조인지, 아니면 끝내 오지 않은 미래의 기억으로만 남을지 어떻게든 가늠해 보는 것이리라. 잃어버린 미래.

추천 영화 목록

-소년과 개 (L. Q. 존스, 1975)

-매드 맥스 (조지 밀러, 1979), 매드 맥스 2: 로드 워리어 (1981), 매드 맥스 3: 비욘드 썬더돔 (1985),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2015),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2024)

-북두의 권 (아시다 도요오, 1986)

-Hell Comes to Frogtown (D. 잭슨, R. 카이저, 1988)

-사이보그 (A. 퓬, 1989)

-더 로드 (존 힐코트, 2009)

-일라이 (휴즈 형제, 2010)

-더 로버 (데이비드 미쇼, 2014)

-터보 키드 (프랑수아 시마르, 아누크 위셀, 요안-칼 위셀, 2015)

-배드 배치 (애나 릴리 아미푸어, 2016)

-퓨처 월드 (제임스 프랭코, 브루스 티에리 청,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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