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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life

알고리즘은 어떻게 만성적인 불만족을 부추기는가

알고리즘은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은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주는 건 늘 아직 갖지 못한 것들뿐이다. 만성적인 불만족에서 내려오는 법.

Por Julieta Rosell · 24 oct. 2026 · 22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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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때 다들 인터넷으로 집에 둘 물건을 사들이던 게 기억난다. 갇혀 지내려면 필요한 게 엄청 많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뭔가 하러 나갈 핑계로 물건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내 친구가 그랬다. 그 친구는 팬데믹 내내 마켓플레이스에서 물건을 사고는 차를 몰고 직접 가지러 다녔는데, 그게 낙이었다. 가지러 가려고 물건을 사는 것. 만족은 소비 자체보다는 그 소비를 둘러싸고 스스로 꾸려낸 활동에 있었다. 산 물건을 가지러 가는 일이 곧 할 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물건 때문이 아니라 구매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구조 때문에 소비하는 건 아닐까? 지금은 쉬인을, 그리고 물건이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그 기다림의 시간을 떠올린다. 소비가 작은 모험이자 계획, 기다릴 무언가, 그러니까 하루하루에 뼈대를 세워주는 방식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면?

요즘 나는 운동복 세트에 꽂혀 있다.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매일 차려주는, 색깔도 핏도 소재도 제각각인 레깅스의 무한 카탈로그 속으로 스크롤하며 빠져든다. 그렇다, 나도 철학이나 문학 콘텐츠만 본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니다, 나는 레깅스를 본다. 인스타그램이 나한테 팔고 싶은 걸 전부 보여주게 내버려둔다. 어차피 도파민 한 방 땡길 거면 좋은 걸로 맞고 싶으니까. 가끔은 오프라인 매장까지 가서 레깅스를 입어보기도 하는데, 결국 예쁘긴 엄청 예쁜데 내가 원하는 핏은 안 나온다는 걸 확인하러 가는 셈이다. 사는 것보다 리서치가 더 즐거운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크롤하고, 레깅스 입어보고, 소비 참기 게임을 하느라 날리는 시간이 어마어마하니까. 레깅스 집착이 내게 할 거리를 주는 걸까?

이럴 때를 위해 바로 코앞에서 대기 중인 게 있으니, 마케팅과 찰떡궁합인 자기애 담론이다. “언니, 그냥 질러, 그럴 자격 있어, 그러려고 뼈 빠지게 일하는 거잖아.” 자기애와 노력에 대한 도덕적 인정이 판매 논리로 버무려진다. 이건 소비가 아니라 정의다. 네가 그걸 사는 게 마땅하다, 뭔가를 회복시켜주는 것처럼. 이런 구호는 구매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주기도 하고, 구매를 부추기기도 한다. 나도 어떤 지출이 정당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이 논리에 기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구매는 일종의 해소가 될 수도 있고, 힘든 하루나 자기 불신, 불안에 대한 보상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다음, 효과가 사라지고 그 물건이 원래 갖고 있던 다른 물건들 사이에 섞여버렸을 때 어떻게 되느냐다.

알고리즘은 절대 네 옷장을, 네가 이미 가진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직 없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성적으로는 레깅스가 더 필요 없다는 걸 안다. 옷장은 꽉 찼고, 옷이 너무 많아서 입을 일도 거의 없다. 입을 일보다 옷이 더 많다. 그런데도 때때로 하나가 모자란 느낌이 든다. 다른 색, 다른 핏, 좀 더 유행하는 것, 예전 걸 대신할 것, 이번에야말로 내가 원하는 핏이 나올 것. 알고리즘은 절대 네 옷장을, 네가 이미 가진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직 없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갖고 있는 레깅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면서도 왜 또 다른 걸 원하는 걸까? 도달해야 할 개수가 있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양의 문제가 아니었던 걸까? 나는 레깅스 보기를 멈추고 욕망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스크롤하는 동안 욕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반복을 통해 어떻게 제조되는지.

부족함의 생산

이 탐색 속에서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메커니즘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무엇도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감각을 설명해주는 물질적·기술적·문화적 인프라가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늘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다. 적어도 예전보다 더 많은 걸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SNS에서 쉼 없이 흘러드는 이미지들, 우리가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삶과 사건들, 우리가 갖지 못한 물건들의 그 급류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것이 부족함의 경험에 한몫한다.

나는 이걸 바로잡아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싶다. 우리 모두를 스크롤을 멈추지 못하는 중독자로 보는 개인 책임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분명한 건, 스크롤은 우리가 뭔가를 찾아내도록 설계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카지노 슬롯머신의 논리를 따라, 다음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믿게끔 설계되어 있다. 이는 '기회 피로'라고 진단되는 상태로 이어진다. 고를 건 많은데 늘 최고는 다음에 나타날 거라고 믿는 것. 내가 레깅스를 두고 겪는 일이다. 발견은 가능하지만 언제나 조금 더 앞에 있다는 느낌. 여기서 나는 잠시 멈춰, 제약이 일종의 방파제나 진정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묻게 된다. 제약이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건 아닐까? 예를 들어 할 게 별로 없는 시골 마을에 사는 게, 동시에 약속 세 개를 못 잡아서 생기는 FOMO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알고리즘은 우리의 욕망을 파악하는 데, 심지어 그것을 증폭하거나 이끄는 데 아주 능숙하다. 그 뒤엔 엄청난 엔지니어링이 있다. 관심 경제에서 우리의 감수성은 착취할 자원이다. 축적은 결코 쉬지 않는 패러다임이고, 영원한 미완의 감각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축적의 논리에게 만족은 불편한 것이다. 이 논리는 순환이 멈추지 않아야 굴러가니까. 오늘날 우리의 관계와 교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가치 증식은 지친 몸과 과잉 자극된 정신을 필요로 한다. 불행은 돈이 되고, 우리는 지쳐 있어도, 아니 지쳐 있을수록 더 계속 소비할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더 많이 정복하고 싶다'는 욕구는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과 깊이 얽혀 있다는 의심이 든다. 화살처럼 '휩쓸며' 나아가고, 정복하고, 무언가를 얻어내는 선형적이고 누적적인 시간.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현재보다 나은 '나중'이 있다.

워너비 욕망

부족함의 경로는 가장 눈에 띄는 것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한다. 처음엔 물건과 소유에 작동하다가(결코 충분히 가질 수 없다), 정체성으로 옮겨가고(결코 충분한 존재일 수 없다), 마침내 애착에까지 스며든다. 나는 사람들이 "요가 해보고 싶어", "책 좀 더 읽고 싶어", "돈 좀 모으고 싶어" 같은 바람을 말할 때마다 그걸 듣는다.

이럴 때 그 욕망이 정말 그 활동을 향하는 건지, 아니면 그 활동이 약속하는 나 자신의 이미지를 향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그걸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걸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욕망은 완전히 '빌려온' 것이어도 삶의 한 시기를 조직하는 판타지를 지탱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그 욕망이 진짜냐가 아니라 그것이 하는 일이다. "마술 배워보고 싶어"나 "하루에 네 시간씩 심슨 가족 보고 싶어" 같은 말은 절대 안 들린다. 그런 건 사회적으로 딱히 좋게 평가받는 욕망도 아니고, 운동이나 저축, 외국어 공부처럼 긍정적인 보상이 따라붙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워너비 욕망이 그토록 잘 먹히는 건 세상의 자극이나 요구에 대한 기성품 답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편함이나 충동이 생기면 세상엔 이미 준비된 답변 카탈로그가 있고, 새로운 걸 지어내는 것보다 그 카탈로그에서 고르는 게 더 쉽다. 정해진 안무가, 대본이 있다. 경주에서 내리는 것보다 계속 달리는 게 더 쉽다. 아니, 멈추는 것보다 계속하는 게 더 쉽다.

우리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기도 쉽다. 충분히 매력적이지도, 재치 있지도, 성공하지도 않았다고, 혹은 내 삶은 보여주거나 이야기할 만큼 흥미롭지 않다고. 이 논리는 여성에게 유독 강하게 작동하고, glow up 유행이 그걸 선명하게 보여준다. glow up은 정해진 기간 동안 이것저것 잔뜩 하면 변신을 맛보고 몰라볼 만큼 달라질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작과 끝이 있는 다이어트라면 아무도 팔지 않을 거라는 거다. 다이어트를 한 번 하고 끝이라면 다이어트도 makeover도 장사가 안 된다. 장사가 되는 건 늘 뭔가가 더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킨케어 루틴에 추가할 제품이, 새로운 엉덩이 운동이, 운동하러 갈 때 입을 레깅스가 언제나 하나 더 있다.

누가 안주를 두려워하랴?

'충분함'을 생각하다 보면 너무 금세 안주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나아지려 하고 만족하지 않는 건 인간의 자질이고, 자기 극복은 인류가 역사 내내 여러 방식으로 추구해온 것이다. 하지만 만족한다는 개념에는 일종의 악마화가 있다. 편한 것만 찾는다는,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편견. 실제로 늘 바쁘고, 풀가동에, 영혼까지 갈아 넣고 있는 상태에 가치가 매겨지고, 심지어 피곤하다는 것조차 잘나가고 있다는 신호로 통한다(세상에, 진짜 개같은 세상이다). 여기서 물어볼 만하다. 내가 ad aeternum 계속 자아실현하고, 자기계발하고, 손에 넣고, 쟁취해야 한다면 그게 대체 누구한테 이득일까? 늘 뭔가를 쫓아 달리다 보면 현재와 단절될 뿐 아니라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게 수상쩍게 느껴진다. 마치 체념이나 평범함, 야망의 결여처럼, 뒤처질 위험을 안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축적의 도덕 체계에서 멈추는 일에는 늘 해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만족한다는 개념에는 일종의 악마화가 있다. 편한 것만 찾는다는,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편견.

이 모든 얘기가 기대치를 낮추라는, 덜 가진 것에 만족하라는 권유나 미니멀리즘 선언처럼 들릴 위험이 있다. 많은 사람에게 결핍이 실제 물질적 문제인 상황에서 그건 위선일 것이다. 내가 생각해보려는 건 많이 갖느냐 적게 갖느냐보다는, 이만하면 됐다고 느끼는 경험,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멈출 수 있다는 감각에 관한 것이다. 넘치는 자원을 가진 사람들조차 충분함을 경험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얼마나 소비하고 욕망해야 하는지 지침을 내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척도, 즉 욕구와 만족의 기준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개인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까지 한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몸에 배고 자연스러워진 어떤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메커니즘은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잘 작동한다. 그것을 관찰한다고 해체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것을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로 착각하지 않게는 해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분함을 생각한다는 건, 잠시나마 늘 뭔가가 모자라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조급함으로부터, 늘 늦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구독을 해지하는 방법일 것이다.

애착의 움직이는 문턱

어려운 건 충분함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지점이 계속 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우리가 나아갈수록 물러나는 지평선처럼. 소비는 만족이 덧없기를 필요로 한다. 만족한 소비자는 소비를 멈추니까. 그러려면 새 물건을 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충분함의 문턱을 끊임없이 옮겨야 한다.

이것 자체는 per se, 나쁠 게 없고,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움직임이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종류의 애착에 기대기 시작할 때 생긴다. 로런 벌랜트는 우리가 욕망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번영을 가로막게 되는 관계를 잔인한 낙관이라고 불렀다. 낙관이란 약속을 좇는 일의 그 들뜨고, 의욕 넘치고, 때론 황홀하기까지 한 면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갑자기 하는 모든 일에 의미가 더해지고, 더 재밌어지거나 덜 버겁게 느껴지는 것처럼. 잔인한 건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장면, 좋은 삶에 대한 판타지와 맺는 관계의 방식이다. 그것이 약속했던 것에 더 이상 우리를 데려다주지 않고 오히려 해를 끼치기 시작한 뒤에도 여전히 우리 삶을 조직하고 있는 그런 관계.

결핍 속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다. 방향이 있고, 의미가 있다. 당근을 쫓아가는 방향 말이다. 정해진 길이 있고, 분명한 탐색이 있다. 원하는 그것을 손에 넣으러 가는 탐색. 결핍은 방향을, 계획을, 심지어 희망까지 만들어 낸다. 시간을 조직하고 삶을 조직하는 이런 논리에서 벗어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도 그래서다. 우리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안다는 데에는 일종의 안도감, 편안함이 있다. 뭔가가 모자랄 때는 방향이 이미 주어져 있으니까. 다음 구매, 다음 목표, 다음 upgrade를 향해 가면 된다. 반대로 어느 날 갑자기 "그래,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한다면 훨씬 더 어려운 질문이 고개를 든다. “그럼 이제 뭐 하지?” 나는 이 질문이 결핍보다 훨씬 더 불안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멈춰 서게 하고, 바라보게 하고, 숨 쉬게 하고, 현재에 머물게 만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잠시나마 무언가를 쫓아 달리기를 멈췄을 때, 살아가는 방식을 새로 지어내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는 바로 그 순간.

배고픈 게 아니라 목마른 거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베타 버전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하면서 끝없는 업데이트의 논리를 들여왔다. 베타 버전은 쓸 만큼은 작동하지만 완전히 완성된 건 아니다. 정식 버전이 되려면 아직 모자란다. 개선의 여지가 있고, 개선되리라 기대된다. 나는 이 구조가 결국 우리 삶에도 스며든 게 아닐까 싶다. 살기 시작하려면 얼마나 더 준비해야 하는 걸까? 셰익스피어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여러분, 이건 리허설이 아니라 인생입니다”. 정말 그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혹시 몰라 늘 인용한다. 어쩌면 충분함이란 삶을 미뤄 두고 사는 일을 그만둘 가능성, 혹은 삶을 위한 끝없는 준비에서 내려올 가능성인지도 모른다.

끝없는 업데이트라는 형식은 그래프턴 태너가 『포에버리즘』에서 오늘날 끝을 만들어 내기가 왜 어려운지 분석하며 펼친 직관과 맞닿아 있다. 태너에 따르면 우리는 끝을 회피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끝이야말로 무언가가 끝났음을, 무언가가 완성됐음을 알아차리게 해 주는 것인데도 말이다. 끝에는 어떤 만족감이나 안도감이 따라붙는다. 아프거나 슬플 수도 있는 무언가, 작별 같은 무언가도 함께. 그런데 아무것도 끝나지 않으면 그런 감정들은 떠오를 기회를 잃고, 그 정서들은 허공에 매달린 채 남는다. 한계와 끝은 끊어 낼 권리, 침묵할 권리, 심지어 잊을 권리까지 열어 준다.

불충분함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들여다보면, 불만족은 더 이상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정치적 범주가 되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된다. 만족은 한계와, 끝과 연결되어 있다. 끝이 없으면 단절도, 단계도, 축하도 없다. 축하는 하나의 이정표이고, 그 여러 기능 중 하나는 어떤 순간, 어떤 사건을 고정하는 것이다. “다른 걸로 넘어가기 전에, 이건 짚고 넘어가고 머물러 볼 가치가 있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축하하면서 우리는 무언가가 충분했음을 인정한다. 축하가 끝없는 가치 증식의 논리를 잠시나마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끝은 의례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수확을, 졸업을, 한 해의 끝을 축하한다. 모든 것을 붙들고 영원화하는 문화, 모든 것이 무한정 열려 있고 업데이트 가능하고 개선 가능한 문화 속에서, 축하라는 몸짓은 그 "됐다"를 확정하며 지금으로서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인정해 준다.

피트니스 업계에서 나온, 아주 수상쩍은 문장 하나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 "배고픈 게 아니라 목마른 거다". 싸구려 단순화 같기도 하고, 위험한 조언 같기도 하다. 배고픔을 물 한 잔으로 해결하거나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이라니. 생리학적으로 입증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감각을 잘못 해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잘 보여 준다. 우리는 종종 한 결핍을 다른 결핍과 혼동하는 건 아닐까. 모든 부족함 가운데 가장 흔한 시간의 부족 역시 불충분함을 구조화한다. 시간이 있어야 가진 것을 누리고, 배운 것으로 성장하고, 얻은 것을 즐길 수 있다. 꼭 여가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머물 시간, 그냥 있을 시간 말이다. 즐길 시간, 심지어 소비할 시간까지도. 쌓아 올리는 건 쉬운 길이다. 배운 길이고, 익숙한 길이다. 하지만 사물과 물건 속에 머물 시간을 스스로에게 내주는 건 무엇보다 어렵다. 더하기를 멈추고, 성장을 멈추고, 이미 고른 것들에 자리를 내주는 것. 그리고 무언가를 고른다는 건 다른 것을 고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새 가구를 방에 들이려면 아마 원래 있던 걸 옮기거나, 다시 배치하거나, 아예 빼야 할 것이다. 남한테 하는 말이자 나 자신한테 하는 말이다.

충분함이란 욕망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끝났다고 여기고 그걸로 족하다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되찾는 것이다.

흔히 거리는 객관성의 도구로 여겨진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과 거리를 두면 그것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넓은 시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거리는 우리에게 어떤 힘, 일종의 지혜를 준다. 그림에서 어떤 대상이나 형태가 배경과 구별되려면 대비가 필요하다. 대비가 없으면 모든 게 똑같아 보인다. 충분함을 이야기한다는 건 사물 주위에 필요한 여백, 숨 쉴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호흡, 포만, 축하는 몸에 그 짝을 가진 충분함의 형태들인 셈이다. 무언가가 끝나기 때문에만 존재하거나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경험들이 있다. 잠자기, 느끼기, 채워지기. 끝을 마련해 주고 한계의 경험을 되돌려 주는 구체적인 실천들이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하고 끝냈다는 사실을 즐길 수 있는 실천들. 영원하지도, 완벽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충분함이란 욕망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끝났다고 여기고 그걸로 족하다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되찾는 것이다. 머물기 시작하는 방법으로서 더하기를 멈추는 것. 산다는 건 어떤 삶들은 살지 않은 채로 남겨 둔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배고픈 게 아니라 목마른 건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모자란 건 옷이 아니라, 이미 가진 옷을 입을 시간, 그 옷을 보고 고르고 매치해 볼 옷장 속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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